갈비뼈 부상 진단은 해프닝…다음 목표는 500홈런
대기록은 SSG가 4-7로 끌려가던 5회 초 2사 상황에서 나왔다. 타석에 선 최정은 롯데 오른손 선발투수 이인복의 초구 슬라이더(시속 127㎞)가 한가운데로 몰리자 놓치지 않고 잡아당겼다. 타구는 시속 153.3㎞로 110m를 날아 사직구장 왼쪽 담장을 넘어갔다. KBO리그 홈런 역사를 다시 쓰는, 기념비적인 한 방이었다. 앞으로 최정이 홈런을 추가할 때마다 통산 최다 기록은 자동으로 경신된다. SSG는 최정의 홈런을 신호탄 삼아 추격을 시작했고, 끝내 승부를 뒤집어 12-7로 역전승했다. "팀이 이기는 경기에서 치고 싶다"던 최정의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
#'소년 장사'의 태동
최정은 대일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영어 교사였던 아버지 최순묵 씨는 "야구가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야구부 가입을 허락했다. 그러나 아들의 야구 재능은 아버지의 예상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최정은 곧바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유신고 시절에는 투타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에이스로 활약하면서도 2004년 고교 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을 정도다. SSG의 전신인 SK 와이번스는 2005년 1차 지명 신인으로 주저 없이 유신고 내야수 최정을 택했다.
최정의 프로 데뷔전은 그해 5월 7일 LG 트윈스와의 인천 홈 경기였다. 당시 SK 선발 라인업은 1번 조원우-2번 이진영-3번 박재홍-4번 김재현-5번 정경배-6번 김기태-7번 박경완-8번 최정-9번 김민재. 고졸 신인이던 열아홉의 최정이 이 '국가대표급' 라인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정이 오른쪽이 아닌 좌타자 타석에서 프로 첫 타석을 치렀다는 거다. 당시 LG 선발 투수는 오른손 최원호였고, 최정은 한창 스위치히터(양손타자)에 도전하던 참이었다. 최정은 "프로 입단 후 2군에서 스위치히터 연습을 시작했다. 언더핸드 투수를 공략하기 위해 모험을 해봤다"며 "2군에서 결과가 좋아서 1군에 올라왔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 후 2007년과 2008년에도 다시 스위치히터에 재도전했다가 또 포기했다"고 돌이켰다. 그래도 최정은 "그때 많이 부딪히고 고민한 덕에 잠수함 투수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사라졌다"며 "올해로 20년째 프로에서 뛰는 것도 많은 것을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도전한 덕분일 것"이라고 했다.
최정은 입단 첫 시즌인 2005년 5월 21일 인천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이보근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터트렸다. 그러나 데뷔 시즌에는 더 이상 홈런 수를 늘리지 못했다. 45경기에서 타율 0.247(85타수 21안타) 11타점을 기록하고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가 처음 홈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건 이듬해인 2006년이었다. 92경기에서 홈런 12개를 때려내며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소년 장사'라는 수식어도 이때 얻었다. 키 180㎝·몸무게 90㎏으로 '거포형' 체격이 아닌 최정이 괴성을 내지르며 연일 큼직한 홈런을 때려내자 그런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꽃피운 최정은 한 시즌도 빼놓지 않고 매년 두 자릿수 홈런을 치는 오른손 거포로 성장했다. 2016년과 2017년엔 2년 연속 40홈런을 넘겨 홈런왕에 올랐다. 특히 2017년 기록한 홈런 46개는 역대 SSG 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이자 KBO리그 역대 3루수 최다 기록이다. 그는 2021년에도 홈런 35개로 1위에 올라 총 세 차례 홈런왕 타이틀을 가져갔다. 또 2012년(26개)·2019년(29개)·2023년(29개)에는 시즌 막바지까지 홈런왕 경쟁을 하다 레이스를 2위로 마쳤고, 2013년(28개)과 2022년(26개)에는 홈런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정이 이승엽을 넘었다
이뿐만 아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홈런 생산 페이스도 점점 빨라졌다. 통산 100호 홈런(2011년 9월 30일 인천 삼성 라이온즈전)까지 6년 4개월, 200호 홈런(2016년 6월 1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까지 4년 9개월이 걸렸는데 300호 홈런(2018년 7월 8일 인천 한화전)까지는 2년 1개월이면 충분했다. 이어 300호포 이후 3년 3개월 만인 2021년 10월 19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이승엽 감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통산 400홈런 고지도 밟았다.
이 감독이 오랜 기간 지켜온 최다 홈런 기록은 그동안 수많은 거포들에게 '벽'으로 여겨졌다. 이 감독은 2013년 6월 20일 통산 352호 홈런을 터트리며 선두로 올라선 뒤 11년 가까이 정상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최정만큼은 일찌감치 이 감독의 기록을 깰 유일무이한 후보로 꼽혔다. 해외 무대를 경험한 이 감독, 박병호(KT 위즈), 이대호(은퇴) 등과 달리 국내에서만 뛰면서 꾸준히 홈런 기록을 늘려나갔다. 최정은 결국 4월 16일 인천 KIA전에서 통산 467호 홈런을 터트려 이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신기록까지 홈런 하나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가슴이 철렁한 해프닝도 벌어졌다. 최정은 타이 기록을 세운 다음 날인 4월 17일 KIA전 1회 첫 타석에서 상대 선발 윌리엄 크로우가 던진 2구째 시속 150㎞ 투심 패스트볼에 맞고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 정밀 검진을 거친 결과 왼쪽 갈비뼈 미세 골절 진단이 나와 한 달 이상 회복에 전념해야 한다는 소견을 들었다. 크로우는 경기 후 "최정이 중요한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며 "최정의 몸에 맞는 공을 던지려는 의도는 절대 없었다. 최정의 홈런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께도 죄송하다"고 공개 사과했다. 이범호 KIA 감독도 경기 후 이숭용 SSG 감독을 직접 찾아가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8일 기분 좋은 반전이 벌어졌다. SSG는 "최정 선수가 오전과 오후 (이전과 다른) 두 곳의 병원에서 추가 검진을 했는데, 두 병원 모두 '왼쪽 갈비뼈 부위 단순 타박상'이라는 동일한 진단을 했다"고 전했다. 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서 장기 이탈은 피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SSG는 "통증이 줄어들 때까지 경기 출전은 어렵지만, 1군 엔트리에서도 제외하지 않을 계획이다. 몸 상태를 매일 점검해가며 출전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정은 실제로 빠른 속도로 회복해 타격 훈련을 재개했고, 사구 후 6일 만인 4월 23일 부산 롯데전부터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이어 긴 아홉수 없이 복귀 2경기 만에 마침내 KBO리그 홈런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이제 500홈런을 향해 간다
최정은 사실 이전까지 '대기록'에 큰 관심이 없던 선수였다.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1년 전까지만 해도 이승엽 감독님의 기록과 내 홈런 기록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몰랐다"며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자신의 이름이 신기록 달성을 앞두고 연일 미디어에 오르내리자 최정은 "빨리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해서 조용하게 내 야구에 집중하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이승엽 감독의 기록을 넘어 역대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로 우뚝 서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통산 홈런 1위 자리를 13년 만에 후배에게 물려 준 이승엽 감독이 "최정은 앞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500홈런 시대를 열 타자다. 600홈런까지도 충분히 칠 수 있다"고 덕담한 뒤였다. 최정은 "내가 이승엽 감독님의 기록을 넘어섰다는 게 '가문의 영광'이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며 "600홈런은 어려울지 몰라도, 500홈런은 나 역시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더 큰 목표를 품고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통산 최다 홈런'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에 묻혔을 뿐, 같은 날 최정이 세운 값진 이정표도 하나 더 있다. 그는 올 시즌 10홈런 고지를 밟으면서 2006년부터 이어온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을 '19'로 늘렸다. 최정은 이미 2021년 장종훈(1988~2002년)과 양준혁(1993~2007년·이상 15년 연속)의 종전 기록을 뛰어넘으면서 역대 최장 기록을 한 해씩 늘려왔다. 다음 시즌까지 홈런 10개 이상을 때리면 2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위업도 달성할 수 있다. 최정은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은 내가 유일하게 애착을 갖고 있던 기록이다. 내 기록을 나 스스로 깨나가는 게 좋아서 그동안 꼭 지켜내고 싶은 목표로 삼고 야구를 해왔다"며 "이제 통산 최다 홈런도 달성했고 홈런 10개도 채워 연속 시즌 기록도 늘렸으니, 더 편하게 타석에 설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최정은 4월 24일까지 친 홈런 468개 중 홈인 인천에서 절반이 넘는 253개(54%)를 터트렸다. 그다음으로는 한화 이글스의 홈인 대전에서 34개,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가 함께 쓰는 서울 잠실구장에서 31개를 각각 때렸다. 이어 부산(26개)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20개)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16개) 수원(16개)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15개) 창원 마산구장(14개) 서울 고척스카이돔(12개) 광주 무등구장(11개) 목동(9개) 창원 NC파크(8개) 포항(3개) 순으로 홈런을 쳤다. 최정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헌납한 팀도 한화다. 15%에 해당하는 68개를 한화전에서 쳤다. 삼성(63개) 두산(56개) KIA(53개) 롯데(52개)도 자주 홈런의 희생양이 됐다. 키움 히어로즈(49개) LG(46개) NC 다이노스(45개) KT(30개) 현대(5개)가 그 뒤를 이었다.
그동안 최정에게 홈런을 헌납한 투수는 총 263명이다. 한화와 KT에 몸담았던 안영명이 8개로 가장 많은 홈런을 맞았고, 롯데와 두산에서 뛴 장원준이 7개로 그다음이었다. 현역 투수 중엔 롯데 박세웅과 KIA 양현종이 6개로 최정 상대 피홈런이 가장 많았다. 투수 유형별로는 오른손 투수를 상대로 65%에 이르는 302개를 쳤고 왼손 투수에게 118개, 사이드암과 언더핸드 투수를 상대로 48개를 때려냈다. 홈런 468개 중엔 솔로홈런이 265개로 가장 많았다. 2점 홈런이 130개, 3점 홈런이 60개, 만루홈런이 13개였다. 최정은 대기록 달성까지 홈런으로 총 757타점을 만들어낸 셈이다. 4월 25일까지 최정이 기록한 통산 타점(1476점)의 51%에 해당한다.
#468호 홈런공은 누구 손에?
최정이 신기록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면서 그의 468호 홈런공을 누가 손에 넣게 될지도 관심거리였다. SSG 구단이 역사적인 홈런공을 무사히 돌려받기 위해 미리 총 1500만 원 상당의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혜택을 받게 된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 사는 KIA팬 강성구 씨(37)였다. 취미로 사회인 야구를 하는 강 씨는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부산에 머물다 이날 최정의 홈런공을 잡기 위해 사직구장을 찾았다. 지난해 부산에서 최정의 홈런이 어디로 가장 많이 넘어갔는지 미리 알아보고 자리를 예매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결국 468호 홈런공을 낚아채는 행운을 잡은 강 씨는 기념구를 최정에게 흔쾌히 돌려주는 대신 올해와 내년 SSG랜더스필드 라이브존 시즌권 2매, 최정의 친필 사인 배트와 선수단 사인 대형 로고볼, 내년 스프링캠프 투어 참여권 2매, 이마트 온라인 상품권 140만 원, 스타벅스 음료 1년 무료 이용권, 조선호텔 75만 원 숙박권, SSG 상품권 50만 원 등을 받게 됐다. 최정조차 "정말 부럽다. 나도 저런 혜택을 받고 싶다"고 말할 만큼 풍성한 수확이었다. 강 씨는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면서 하루 1선행을 한다는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처럼, 나도 경기 전날 집에 들어가다 휴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더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며 "그래도 우승은 KIA가 했으면 좋겠다. 우리 김도영(KIA) 선수가 최정 선수처럼 홈런을 많이 치는 선수로 훌륭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최정과 동고동락했던 지인들은 오래 기다린 대기록의 탄생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2007년 SK에 입단해 최정과 인천 야구의 역사를 함께 써온 SSG 에이스 김광현은 "16~17년 전 형과 내가 서로 승수와 홈런 수를 놓고 내기하던 추억이 떠오른다"며 "아마도 내가 최정이라는 타자가 친 홈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선수일 것"이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때마침 롯데 더그아웃에서 친형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게 된 친동생 최항도 "어릴 때 집에 오자마자 옥상에서 혼자 훈련하던 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홈런 개수만큼 형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며 "앞으로 남은 기록들도 형이 늘 하던 대로, '최정답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응원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