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난 해소 위해 9억 달러 들여 토지 매입 중…많은 논란과 우려에도 사회문제 해결 새 모델 될지 관심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솔라노 카운티’라는 지역의 대규모 농지를 실리콘밸리의 거물들이 ‘플래너리 어소시에이츠’(이하 ‘플래너리’)라는 법인을 통해 매입해 큰 논란이 됐다. 플래너리는 스스로의 정체를 꽁꽁 숨겼다가 지역 사회와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급기야 연방수사국(FBI)까지 나서면서 논란이 커지자 스스로 그 정체와 투자 목적을 공개했다.
플래너리를 주도하는 골드만삭스 출신의 얀 슬라맥은 실리콘밸리의 주거난 등을 해소할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얀 슬라맥은 플래너리의 모회사인 ‘California Forever’의 설립자이자 현 대표이다.
지난 2월 미국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플래너리는 지금까지 약 6만 에이커(243㎢)에 약 9억 달러를 썼다. 플래너리의 토지 매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일부 주민과 소송전까지 벌이기까지 했다. 나아가 도시 개발을 위한 토지 용도 변경 등을 위해 제도권과의 논의도 계속하고 있다. 플래너리는 지역 주민을 설득하기 위해 설문조사도 했다. 질문 중에는 바이든, 트럼프, 플래너리 셋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저명한 한 정치학자는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이상적인 체제인 민주주의를 두고 볼 때, 투표로 선출된 통치자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국민 모두를 위해 한정된 국가의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본연의 임무다.
현실에서 과연 정치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나라에서도 정치권은 쉽게 당파적으로 나뉘고, 시급히 당면한 사회적 문제는 당파 사이의 대립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투표권이 없는 미래 세대에게 떠넘겨지기가 부지기수다.
최근 치러진 국내 주요 선거는 물론이고 여러 나라의 선거 캠페인을 보면, 민주주의의 역할은 반민주세력과 독재를 막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정치가 주거난을 비롯해 기후위기, 인구감소 및 고령화 등 시급한 사회적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문제의 시급성과 중대함에 비해 정치적 논의와 제도 마련은 크게 뒤처져 있는 실정이다.
바이든, 트럼프, 플래너리 셋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겠느냐는 질문은 위와 같은 정치 현실로 인한 유권자의 회의감을 자극해, 플래너리에 대한 적대감이나 비호감도를 낮추고자 한 꽤나 영리한 마케팅이다.
마케팅과 별개로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치가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주거난과 같은 문제를 자본이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만약 해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자본이나 기업이 국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냐는 선정적이고 순진한 논의를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과 기업은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플래너리가 던진 위 질문은 효과적인 마케팅일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의 설득전략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의 투자자가 마련한 자원을 통해 한정된 정부재정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따져 보면, 산업활동이나 기업에게 큰 책임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환경 문제가 대표적이고, 주거문제 역시 노동력의 공급 및 수요와 맞닿아 있으므로, 기업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민주적 통제와 절차를 충실히 따르면서 대규모 자본을 투하한다면, 효과적이면서도 바람직한 사회문제 해결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고자 할 때는 이익이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기고(미국·유럽 뛰어가는데…ESG 경영 ‘제자리 걸음’)에서도 소개했던 미국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2019년 ‘기업 목적에 관한 성명서’는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직원에게 투자하고, 공급자를 공정하게 대우하며, 공동체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선언이 충실히 지켜진다면 자본과 기업이 지속가능한 발전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래너리는 사업 착수나 토지 매입 과정에서 이미 많은 논란과 우려를 낳고 있다. 앞으로는 부디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에 관한 유의미한 선례가 되길 기대해본다.
노종화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다. 현재(2017년 5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상근)으로도 재직 중이다.
노종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