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 반대 속 통과돼도 대통령 거부권 행사 가능성…피해자들은 ‘시간과의 싸움’ 중
#‘선 구제, 후 회수’ 방안 두고 대립
5월 2일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 본회의 부의의 건’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별법 개정안이 본회의에 직회부된 지 65일 만이다. 지난해 5월 여야가 전세사기 특별법에 합의하면서 6개월 후 특별법을 보완입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특별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27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지만 국민의힘 반대로 법사위에서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못했다. 결국 2월 27일 국토위에서 본회의 부의 요구안을 처리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5월 말 21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를 개최해 전세사기특별법을 표결에 부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정부와 여당이 특별법 통과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이날 특별법 개정안의 본회의 부의의 건에 대해서도 국민의힘 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졌다. 2022년 5월 취임 후 현재까지 9회에 걸쳐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 2일 ‘채 상병 특검법’이 야당의 단독 의결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곧바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기도 했다. 이 경우, 공은 22대 국회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여야는 전세사기 피해자의 보증금 반환채권을 매입해 피해자에게 임차 보증금을 먼저 돌려준 뒤, 경매 배당이나 주택 매수·매각 등을 통해 회수하도록 하는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을 두고 입장이 갈리고 있다. 여당과 국토교통부는 수조 원의 재원이 필요하다며 특별법에 반대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평균 보증금은 1억 3000만~1억 4000만 원이고 내년까지 나올 총 피해자 수만 3만 6000명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보증금 총액만 약 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임차보증금 반환채권 매입에 소요되는 재원은 5850억 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선순위 임차인 등은 굳이 보증금 채권 매입을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약 3만여 명의 피해자 중 최우선 변제금(소액 임차인이 보증금의 일부를 다른 권리자보다 먼저 변제받을 수 있는 금액)도 못 받는 후순위 임차인(선순위 근저당권이 있는 상태에서 임대차 계약을 맺은 임차인)은 약 50%로 추정된다. 피해자들의 평균 보증금액을 1억 3000만 원으로 잡고 후순위 임차인 수와 곱한 후 최우선 변제금 수준인 30%를 국가가 구제해준다고 보고 산출한 수치다. 30%는 야당이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정부와 여당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정한 수치다.
이철빈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주거권 네트워크에서 인천, 서울, 부산 등 각지에서 1500여 피해 가구를 조사해서 후순위 임차인 비율과 보증금을 산출했다. 국토부는 실태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접수된 피해자 인원을 그냥 합치고 피해자들의 평균 보증금액을 다 곱해서 5조 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실태조사를 통해 정확한 데이터를 갖고 예산을 추산해야 하는데 지금 국토부는 전체 피해자의 보증금 전액을 다 합쳐서 세금 손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굉장히 부정확하다”라고 지적했다.
개정안의 세부내용과 관련해 보완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4월 30일 여의도 케이에프아이(KF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지원을 위한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역할 토론회’에서 김택선 주택도시보증공사 준법지원처장은 “임차보증금 반환채권의 공정한 가치 평가를 위해선 예상 낙찰가율, 권리관계 파악이 안 된 주택의 선순위 채권금액 산정 등이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산정할지가 난제”라고 지적했다.
김규철 국토부 주택토지실장도 “현재 개정안은 공정한 가치평가, 채권 매입 기준이나 절차 등이 불분명해 전문가들과 추가 논의 없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우려가 있고, 실질적인 지원도 어렵다”라고 말했다.
#경·공매 유예조치 만료 시점 임박
개정안을 당장 보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다. 최대 1년까지 보장한 전세사기 피해주택의 경·공매 유예조치의 만료 시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후순위 임차인의 경우 대항력(임차주택의 양수인 등 제3자에게 임대차 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이 없어 경·공매가 진행돼 주택이 낙찰되면 그대로 쫓겨나게 된다. 낙찰된 금액을 선순위 채권자들이 나눠 가지면 보증금은 단 한푼도 돌려받지 못한다.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들이 대표적이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지난 4월 30일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저희에게는 시간이 없다. 느긋하게 정부에 준비시간을 주고 설득할 만한 여유가 없다”며 “지금도 법원에서 경매중지신청을 더 받지 않겠다고 해서 매각 세대가 날마다 늘고 있으며 저 또한 5월 13일이 경매일로 주택이 매각될 것이다. 지난 1년간 현실적 지원을 요청하며 경매 중지를 요청했는데 물거품이 됐다”고 밝혔다.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라고 밝힌 정영욱 씨는 일요신문에 “법원경매계도 어디는 유예신청을 받아주고 어디는 안 받아주고 기간도 1~3개월로 일정하지가 않아서 피해자들이 고통을 많이 받았다. 이미 인천은 올해부터 계속 집이 넘어가고 있는 피해가구들이 적지 않다”며 “개정안이 통과가 돼도 막막한 상황이다. 집이 팔리고 나면 정부가 이미 쫓겨난 피해자들의 보증금 채권까지는 매입을 안 해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철빈 위원장은 “개정안이 통과가 돼도 시행령 만들고 각 기관에서 어떻게 할지 방침 만드는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피해자들은 계속 쫓겨나고 있다. 긴급주거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며 “80% 이상이 전세대출 끼고 있어서 대출 금액 상환도 문제인데 방안이 전혀 없다. 5·6월부터는 쫓겨나는 후순위 임차인 분들이 대거 발생할 텐데 그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정부 여당이 반대만 일삼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현행 특별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신탁사기 피해자들도 명도소송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있다. 부동산신탁의 경우 집주인이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이전하고 신탁회사는 부동산을 관리, 개발, 처분해 수익을 돌려주는 제도다. 이 경우 집주인이 주택을 임대할 때 신탁회사의 동의서까지 받아야 임대차의 권리 효력이 생긴다. 임대차 계약을 제대로 맺지 않고 집주인이 파산해 신탁회사에 신탁보수료를 입금하지 않을 경우 신탁회사는 환가 및 정산을 위해 해당 부동산을 공매하면서 명도소송을 제기해 임차인을 내쫓을 수 있다.
신탁사기 피해자라고 밝힌 정태운 씨는 “보증금은 총 1억 원이고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줄 몰라서 불법 임차인이 됐다. 신탁회사에 명도소송을 당하고 있는 중인데 명도는 100% 패소라고 하더라”라며 “임대차 계약 권리 자체를 인정받지 못 하기 때문에 보증금 회수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당장 특별법 개정안이 적용되면 명도소송이나 신탁 공매를 중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라고 밝혔다.
우선 법안을 통과시킨 후 보완 입법을 통해 세부내용을 다듬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영욱 씨는 “개정안이 시행돼도 쉽지 않지만 지금 현행 특별법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워낙 전무하다 보니까 피해자들이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다”라며 “무조건 5월에는 개정안을 통과시켜 놓고 다음 국회 때 수정안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