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교수들도 ‘원점 재검토’ 한목소리…의협 불신 탓에 의협 중심 협의체 구성 어려울 전망
#“전면 백지화 원해”
5월 1일 임현택 신임 회장을 중심으로 의협의 새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의·정 협상에 적신호가 켜졌다. 당선 전부터 “오히려 (의대) 정원을 500~1000명 줄여야 한다”고 주장해 온 임 회장은 의협 내에서도 초강경파로 분류된다. 그는 4월 28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에서 열린 의협 정기 대의원총회에서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올바른 목소리를 낼 것이고, 의료를 사지로 몰아가는 정책은 죽을 각오로 막아낼 것”이라며 강력 투쟁을 시사했다.
이런 가운데 의사 단체들은 ‘의대 증원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강경파 노선에 동참 내지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당초 의사 단체는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의사 직역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상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0일 넘게 이어지는 의·정 갈등이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 일부 의사들의 설명이다.
먼저 전공의 공백을 채우던 교수들은 체력적 한계를 느끼고 주 1회 휴진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대화의 장을 마련하겠다고 나서는 등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던 교수들의 태도에도 다소 변화가 생겼다.
서울대 의과대학 소속 교수들은 4월 30일 하루 진료를 중단하고 서울대병원 제일제당홀에 모여 ‘대한민국 의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회의 내용은 정부를 향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방재승 서울의대 교수협 비대위원장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이 단 두 달 만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졌다”며 “정부는 단지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이 진정한 의료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씌워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기영 분당서울대병원 병리과 교수는 “의사들이 앞장서서 우리나라에 팽배한 포퓰리즘과 파시즘과의 투쟁을 시작하자”고 했다. 이어 박민수 복지부 2차관에 대해서는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길거리로 내몰아 때려잡으려는 모습을 유도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3월까지만 해도 교수협의회가 중재자를 자처하며 정부·의협·여야·국민이 참여하는 대화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전공의와 의대생들 역시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의대정원 증원 ‘원점 재논의’가 아니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공의가 다수다. 의대생들은 여전히 수업 거부를 외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공의는 일요신문에 “최대집 집행부의 밀실 합의 이후로 의협에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사태가 길어질수록 정부에 대한 반감은 커지고 의사끼리는 더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개인의 생각이지만 어떻게든 결론이 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을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고 덧붙였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던 의사 단체가 조금씩 뭉치기 시작한 이유는 의협이 각 단체의 요구를 수렴해 앞장서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공의들의 경우 복지부 박민수 차관에 대한 반발심이 극도로 높은 상황인데 의협이 정부에 ‘박 차관 경질’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등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휴진 결정에도 임 회장은 “정부가 교수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14만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총력을 다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한 입장차
이처럼 의사 단체가 강경 노선을 걷고는 있지만 의협을 중심으로 한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까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이 협의체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5월 1일 박 위원장은 내부 공지를 통해 “대전협은 임 회장과 범의료계 협의체 구성에 대해 협의한 바 없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 역시 협의체 구성에 대해 논의한 바 없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 같은 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전국의사총연합(전의총)은 무엇인가요”라는 글과 함께 2018년 당시 최대집 의협 회장이 당선 직후 집행부 인선을 마치고 본격적인 투쟁 준비를 끝냈다는 기사를 첨부하기도 했다.
박 위원장이 의협을 불신하는 이유는 2020년 파업 당시 의협 집행부의 밀실 합의 때문이다. 최 전 의협회장은 2020년 문재인 정부의 의대 증원 및 공공의대 신설에 맞서 투쟁의 전면에 섰다. 상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공의들은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고 의대생들은 국시 응시를 거부했다.
이후 최 전 회장이 의사 단체 대표로 정부와 ‘9·4 의정합의’를 맺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공의와 의대생들의 의견은 묵살한 채 합의를 도출해 전공의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전공의 대표였던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은 당일이 돼서야 합의 체결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때 의협의 결정에 반발해 의사 국가시험 응시까지 거부했던 졸업반 의대생들이 지금의 전공의다. 이런 이유로 대전협은 의협과 같은 의견을 내더라도 공동의 협의체는 만들지 않는 등 일정 거리를 둬왔다.
정리하면 전공의들은 의대 증원 백지화라는 방향성에는 동의하나 의협 중심의 협의체 구성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제 막 닻을 올린 의협 새 집행부로서는 체면을 구기게 된 상황이다. 임 회장은 취임 전부터 정부와의 일대일 협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협을 중심으로 한 ‘범의료계 협의체’를 구상해온 바 있다.
이에 대해 의협은 조율을 통해 이견을 좁힐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협 관계자는 5월 3일 “의사 직역 간의 이견은 항상 있어왔고 정상적인 절차”라고 말했다. 임 회장 역시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14만 의사 회원이 어떻게 똑같은 생각을 하겠나”며 “논의가 충분히 진행돼야 구체적인 협의체가 나오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의대생, 전공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낼 그릇을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팎으로 길어지는 싸움에 의료계 내부에서 “좀처럼 합의점이 안 보인다”며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봉직의는 “정책보다는 감정싸움이 되어버렸다. 갈등이 길어질수록 악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며 “대표성 있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5월 안에는 이 사태가 마무리되어야 한다. 교수들도 지치고 무엇보다 의사를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크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