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 3곳 자료 참고…정부 ‘각 연구결과에 대해 폭넓은 해석’ 항변할 듯
#의사단체의 마지막 역습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재판장 구회근)는 4월 30일 의대교수·전공의 등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 심리에서 "의대 입학정원을 2000명 늘린 과학적 근거를 제출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1심인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김정중)가 각하를 결정한 때와는 재판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특히 항고심 재판부는 "추상적인 말 대신 어떻게 추진할 계획인지 자세히 밝혀줘야 한다"고까지 당부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증원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주장하는 '무리한 정책 추진'에 해당할 가능성도 고려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부의 답변 기한은 5월 10일, 서울고법은 5월 안으로 판결을 내릴 계획이다.
대학별 의대 증원 규모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이런 상황은 정부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정부가 시민의 압도적인 여론에 힘입어 의사 증원을 추진해 왔으나, 정작 왜 2000명이어야 하는지를 놓고는 누구도 자세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의협 등에선 현재 상황을 사실상 '마지막 역습 기회'로 보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2000명 증원 판단의 근거로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 및 중장기 수급추계(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1년 장래인구추계를 반영한 인구 변화의 의료 부문 파급효과 전망(한국개발연구원)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인력 적정성(홍윤철 서울대 예방의학과 교수) 등의 자료를 주로 참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해당 보고서들은 의사를 정확히 몇 명 늘려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미래의 고령화와 인구구조 및 신종 바이러스 출현 등 여러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그에 따른 연도별 부족 의사 수를 전망했다. 예컨대 10년 뒤인 2034년 의사 1000명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나오면, 정부는 한 해에 100명씩 늘린다고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의협 등 단체들은 단단히 벼르는 분위기다. 이들 보고서에서 증원 규모가 2000명이 되어야 할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 탓이다. 실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경우 연간 최대 약 1700명, KDI는 약 200명 안팎이 적정하다고 판단했다.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인력 적정성 자료를 만든 홍윤철 교수는 최대 약 1500명을 증원해도 부족하지만, 이 경우 특정 시점에 다시 줄여야 한다고 내다봤다.
#정부, 각종 변수 '영끌'한다면…
정부는 각 연구결과를 폭넓게 해석했다는 취지로 항변할 것으로 관측된다. 먼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 결과는 최대 1700명 증원이 필요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만큼 정부안과 비교적 비슷한 결과를 도출했다. 최근 전국 대학들이 신청한 1500명대와 유사한 숫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또 신종 바이러스와 기후위기에 따른 질병은 물론 남북통일에 이르기까지 쉽게 예측이 어려운 변수들도 고려했다. 이를 반영한 결과치가 최대 1700명 증원인데, 이는 각 요인들이 개별적으로 작용할 때 수치이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러 요소가 중복돼 발생하는 시나리오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한국개발연구원은 "현재 3058명인 의대 입학 정원에서 5∼7%(152∼214명)씩 늘려야 필요 인력에 가장 근접한 의사 규모를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혀 정부안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곳이다. 단, "의사들의 과로 등 노동생산성은 고려하지 않았고, 소아청소년과 등의 인력 부족은 연구결과보다 빠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홍윤철 서울대 교수는 2000명 증원 자체를 연구대상에서 제외해 의협 등이 주목하는 연구 결과다. 홍 교수는 최대 1500명 늘렸을 때 부족한 의사 수를 관측했는데, 이 경우 "일정 시점이 지나면 의사 과잉"이라고 내다봤다. 그렇지만 "1500명을 늘려도 2043년까지는 3035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대목이 있다.
정부는 이들 보고서 외에도 각종 자료를 더 마련했다고 전해졌다. 2024년 3월 지역 거점 국립대를 중심으로 한 의대 신규정원 배치의 절차 및 결과도 포함됐을 수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증원 신청서에 지역 의료수요 및 대학별 의료 여건 개선의 성과 등도 담겼다"며 "그 외 유관부처가 보유한 각종 자료들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떤 자료들을 내놓든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와 대한의학회는 5월 8일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과학성 검증 위원회'(가칭)를 구성하기로 했다. 30∼50명의 의료 전문가가 정부의 2000명 증원 근거를 놓고 타당성을 검증할 계획이다.
한편, 일각에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만든 자료에도 눈길을 둔다. 경실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내 지역별 인구 대비 의사 수 및 미래 인구 전망 등을 토대로 한 분석 결과를 2023년 6월 내놓은 바 있다. 의대 입학정원을 '최소' 1000명, '적정' 3000명씩 늘려야 한다고 바라봤다.
시민단체 사이에서는 정부안과 유사한 수치에 놀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연도별 의사 부족 숫자도 2040년 3000명대로 예측하는 등 정부가 참고한 조사들과 결과가 비슷했다. 공교롭게도 경실련은 이 자료를 내기 한 달 전인 2023년 5월까지 복지부와 '이용자 중심 의료혁신협의체'에서 의사 증원을 꾸준히 논의해 왔다.
다만 경실련 관계자는 "이용자 중심 의료혁신협의체에서 의사 증원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또 "저희가 제시한 숫자와 정부안이 근사치이긴 한데, 협의체에서 관련 자료들을 복지부 측에 자세히 소개하거나 전달한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실련은 '공공의대 설립' 등을 전제로 한 2000여 명 증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며 "서울·수도권과 기타 지방의 의료 격차가 크기 때문에 수도권 바깥 지역에 의사들이 남을 수 있는 구조적 대책 역시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법원에 제출한 근거 자료와 후속 조치 등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2000명 최초 결정은 복지부 아닌 ‘외부’? 의대 증원 '회의록' 존재 여부 논란
최근 보건복지부 산하 보건의료정책심의회(보정심)의 회의 속기록이 없다는 논란이 불거져 이 역시 정부의 정책 추진에 변수가 될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애초 복지부는 회의록이 없다고 밝혔으나, 다시 "회의록은 있고 속기록만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단체들은 이 또한 반격 기회로 보고 있다. 복지부가 말을 바꾼 데다, 회의록 공개도 거부한 상황에 비춰 '무언가 숨기는 게 있지 않겠나' 의심하는 분위기다. 2000명 증원의 합리적 근거가 회의록에도 없을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사직 전공의들은 5월 7일 박민수 복지부 차관 등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직무유기와 공공기록물 폐기 등 혐의로 고발까지 했다. 고발 대상에는 이주호 교육부 장관, 오석환 교육부 차관, 심민철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 등도 포함됐다.
이들의 소송대리인 이병철 변호사(법무법인 찬종)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의대 증원 규모 2000명을 최초 결정한 쪽은 복지부가 아닌 '외부'로 의심된다"며 "그 외부가 윤석열 대통령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특히 "법원의 워딩은 정부에 2000명 증원을 결정한 '회의록'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면서 "정부는 의료현안협의체에서도 대한의사협회와 의대 증원을 논의했다고 말하는데, 의협은 이를 부인하고 있어 회의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회의록이 의사 증원 정책의 운명을 가를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우선, 이 변호사 주장과 달리 서울고법은 정부에 2000명 증원 근거를 꼭 회의록으로만 요구하진 않았다. 재판부는 "2000명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제출해 달라. 회의자료, 회의록 같은 게 있으면 내 달라"고 요청했다. 회의록을 특정한 게 아니라 제출해야 할 자료의 한 예시로 들었을 뿐이라는 의미다.
의료현안협의체의 경우 회의록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의협도 참여한 만큼 의사단체들도 인지해온 사항이다. 의사 증원 논의는 의협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했다(관련기사 일방적인 정부, 회피하는 의협…지난 1년 의정 회의 결과 들여다보니).
일련의 논란에 대해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보정심 등의 회의록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며 "복지부는 담당자를 즉각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복지부 관계자는 "보정심 회의록을 비롯한 일체 자료들을 법원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