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의대생 학습권보다 공공복리 더 중요하게 판단…전공의들 “안 돌아간다” 입장 강경
#‘더 중요한 것’ 있다는 법원
서울고법 행정7부(구회근 배성원 최다은 부장판사)는 5월 16일 보건복지부·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의대교수·전공의·수험생이 낸 집행정지 신청은 각하하고, 의대 재학생들의 신청은 기각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의대생의 원고적격 즉, 당사자성이 인정됐다는 부분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의대 교수는 물론 의대생도 이번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판단하고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 하거나 청구한 내용이 판단 대상이 아닐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재판을 끝내는 결정이다. 쉽게 말해 1심 재판부는 의대생에게는 집행정지를 신청할 자격이 없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항고심 재판부는 의대생이 이번 사건의 당사자이며 집행정지를 신청할 자격도 있다고 인정했다. 교수와 달리 재학생의 경우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기존 교육시설에 대한 참여 기회가 실질적으로 봉쇄돼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를 제한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의대 재학생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의대 정원이) 과다하게 증원돼 의대 교육이 부실화되고 파행을 겪을 경우 의대생들이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학생들이 입을 손해에 비해 증원 정책을 중단했을 때 공공복리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고 봤다. 재판부는 “의대생의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막을 긴급한 필요성은 있지만, 증원 처분을 정지하면 의대 증원을 통한 의료개혁이라는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며 “전자를 일부 희생하더라도 후자를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대 정원 증원 처분을 집행정지할 경우 필수·지역의료 회복 등을 위한 필수적 전제인 의대 정원 증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즉, 법원은 학습권 침해라는 개인 혹은 집단의 피해와 필수·지역의료 회복이라는 공공복리를 저울질했을 때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논란의 ‘2000명’ 근거는?
이번 판결에서 주목할 부분은 지난 1년 동안 정부가 주도해 온 의대 증원 논의와 증원 규모에 대한 법원의 평가다. 그동안 정부와 의료계는 2000명이라는 증원 인원에 대한 조사가 과학적인지, 또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졌는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2심 재판부는 정부가 주장하는 ‘2000명 증원’에 대한 근거가 다소 미흡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고 했다. 2000이라는 숫자는 2035년에 필요한 의사 1만 명을 배출하기 위한 산술적 계산에 기한 것일 뿐, 수치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다만 논의의 절차적 정당성에는 하자가 없고 의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결정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현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위해 일정 수준의 연구와 조사, 논의를 지속해 왔고 그 결과 이 사건 처분에 이르렀다”고 판시하면서 “설령 2000명이라는 구체적 수치는 이 사건 증원발표 당일 처음으로 제시됐다 하더라도 의사 인력의 확충을 꾸준히 논의해 왔고, 대한의사협회는 증원 규모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2000명이라는 수치 자체에 관한 근거는 다소 미흡한 것으로 보이나, 의사인력이 부족해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일응 근거가 있다고 할 것”이라며 “(근거가) 비록 충분치는 않다고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과 합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도 밝혔다.
판결문을 살펴본 민사 전문 변호사는 “재판부가 20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 판단을 내렸다기보다는 의대 증원의 사회적 필요성과 행정집행절차에 하자가 없었음을 확인한 재판이다. 구체적인 숫자는 정부와 의대생, 혹은 학교가 논의할 부분으로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분석했다.
#전공의 “오히려 잘 돼…안 돌아간다”
법원이 정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는 의대 증원 절차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지만 의·정 갈등이 쉽게 봉합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16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사법부의 결정을 전환점으로 전공의들이 조속히 돌아오길 간곡히 바란다”고 했지만 전공의들은 아직 복귀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기각 결정이 “오히려 잘되었다”는 전공의들도 있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전공의는 일요신문에 “애초에 전공의들이 분노했던 건 정부의 태도 때문인데 가처분 신청이 기각됐으니 돌아오라는 게 더 이상하다”며 “오히려 잘됐다. 인용됐으면 분위기 상 아무런 협상도 못 한 상태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을 텐데 이제 더욱 복귀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다만 전임의들은 조금씩 복귀를 준비하는 분위기다. 전임의는 전공의 과정을 마친 전문의들로 통상 임상강사 혹은 펠로우라고 부른다. 17일 복지부에 따르면 삼성서울병원·서울대·서울성모·서울아산·세브란스 등 이른바 ‘빅5’의 전임의 계약률은 14일 기준 70.4%를 기록했다. 지난 2월 말 33.9%와 비교해도 30% 넘게 오른 것인데 최근 공보의 소집해제로 전역한 군의관들이 전임의 계약을 맺은 것이 계약률 상승의 원인으로 꼽힌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