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기본 원리 배우고 탈북 결심…탈북 선배 의원들과 남북관계 위해 힘쓸 것”
―북한에서 유년, 청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아버지께서 군인 신분이라 떨어져서 살았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열 살쯤에서야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됐다. 중학교 1학년까진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중학교 2~3학년은 친구들과 학교 안 가고 놀았다. 당시 고난의 행군을 겪을 시기였다. 굶어 죽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생 출석률이 50%도 안 될 정도였다. 학교 규율이 무너지니까 공부하기 싫었다.”
―무단결석 사실을 부모님께 안 들켰나.
“아버지가 북한 영재학교 ‘제1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라고 했는데, 그때 들키게 됐다. 수험표를 받아야 시험 볼 수 있다. 어머니께서 수험표를 부탁하러 학교에 갔는데, 교장선생님이 ‘박충권 학생이 1년 중에 6개월만 출석했다. 부모님은 뭐하고 계셨냐’며 거절했다. 어머니께서 창피한 상황이 됐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다시 가서 수험표를 받아오라고 채근했다. 어머니는 다시 학교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결국 교장선생님이 ‘붙으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조롱하면서 수험표를 줬다.”
―북한 영재학교 ‘제1고등학교’ 입학은 어떻게 했나.
“예비시험까지 4일 남았는데, 벼락치기를 했다. 그나마 학교를 다녔던 여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와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잘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줬다. 잠은 하루에 2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만 했다. 아버지도 같이 잠을 안자면서 옆에 있었다. 그렇게 예비시험을 봤다. 예비시험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어버렸다. 이후 한 달 동안 공부해서 본시험도 합격했다. 1고등학교는 매달 경시대회를 해서 180명 전교생 순위를 학교 정문에 있는 보드에 써놓는다. 입학 첫 경시대회에서 36위를 했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셨나.
“집에 들어가면서 시험 잘 봤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버지께서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며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어머니한테는 저 자식 밥 주지 말라고 했다. 엄하셨던 아버지한테 인정받으려고 오기로 공부했다. 그런데 사실 학생들이 도긴개긴이었던 것 같다. 고난의 행군을 갓 벗어날 때라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도 합격하지 않았나 싶다.”
―김정은국방종합대학으로 진학한 이유가 궁금하다.
“1고등학교에서 3위로 졸업했기에 어떤 대학도 갈 수 있었다. 1~2등은 1학년 때 해커부대로 뽑혀 갔다. 나머지 3~12등은 면담을 한다. 티오(TO·정원)가 김일성대 5명, 김책공대 5명, 국방대 1명이었다. 사실 국방대가 뭔지 몰랐다. 고위직 자녀였던 친구가 국방대가 완전 좋은 곳이라고 얘기를 해줘서 알게 됐다. 그 친구는 70~80등이라 국방대 갈 수 없는 성적인데, 할아버지가 TO를 늘려서 보냈다. 할아버지가 바로 북한 핵·미사일 개발의 핵심 과학자였던 주규창 전 노동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이다. 어릴 때는 힘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자 집안이 좋은 기회를 갖는 것도 보편적이었다. 부모들이 자녀 공부시키고 싶으면 선생들한테 뇌물 주는 거 만연했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군사학교라서 학기 시작하기 한 달 전부터 군사훈련을 시킨다. 너무 힘들었다. 기합을 많이 받아서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였다. 나중엔 적응하다 보니까 할 만했다. 3학년부터 학생 간부였어서 통제하는 입장이었다. 배고픔이 많아서 굉장히 힘들었다. 국방대가 김정일 정권이 중시한 학교라서 군대보다 보급 잘 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한창 먹을 나이라서 그런지 보급이 부족했다. 배고픔을 달고 살아서 그런지 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굉장히 내몰리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도 알 수 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나중에 졸업하고 나선 추억이 많긴 한데, 대한민국에선 추억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전공은 왜 화학재료공학과로 선택했나.
“과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학생이 어떤 공부를 잘 하는지 상관없이 배치한다. 지역마다 기업이 특화돼 있다. 함경도는 화학공업, 자강도는 기계공업이나 화약, 평안도는 로켓이 특화돼 있다. 나는 함경도 출신이라 화학과를 가게 된 것이다. 선택할 수 있으면 사회주의가 아니지 않겠나.”
―ICBM 관련 윤활액과 부동액 등을 연구·개발했다고 언론에서 조명한다.
“사실 개발자가 아니라, 대학 전공자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지도교수가 연구하던 걸 졸업논문으로 했다. 학생들이 논문 주제 찾기 쉽지 않다. 지도교수가 국방과제로 연구하고 있던 걸 학생들에게 졸업논문으로 쓰라고 나눠준다. 윤활액과 부동액은 정찰위성과 같이 우주에서 기계 부품들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분야다. 추운 동계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군수공장에 배치받았지만, 탈북을 결심한 이후라 안 갔다. 그로부터 1년 8개월 만에 탈북했다.”
―북한에 ICBM은 어떤 의미인가.
“북한의 모든 것이다. 김정은이 핵, ICBM, 해킹을 3대 전쟁 수단이라고 꼽았다. 북한은 잘 살면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일부러 못 살게 한다. 외부 정보를 차단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 위기를 조성한다. 북한이 먼저 도발해놓고, 미국과 남한이 우릴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자극해서 똘똘 뭉치게 한다. 위기만으로 안 되니까 핵실험 영상을 선전물로 보여주고, 열병식 퍼레이드를 통해 신무기를 공개해서 자긍심을 고취시킨다. 핵, ICBM 만들어서 미국도 건들 수 없는 수준 가겠다는 것이 북한 의도다.”
―탈북은 왜 결심했나.
“대학교 3학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 결론을 내렸다. 학생 간부여서 보위부 중좌와 소통하며 협조한다. 그 중좌가 나를 포함한 학생 80명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친구들의 모든 언행을 평가하고,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했다. 뻔하다. 스파이가 있는 것이다. 중좌랑 술 마시면서 친해진 뒤 알아냈다. 일반 학생 8명이 스파이였다. 학생 간부여서 김정일이 직접 쓴 사회주의와 관련 논문도 2개나 읽었다. 사회주의 옹호하고 서방의 체제를 비판하는 논문인데, 서방의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게 됐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기본 원리를 배우게 됐다. 그렇게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 갖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윗선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알게 됐나.
“졸업 이후에도 배치된다. 지방 출신이 평양 거주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신분 갈아치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선노동당 중앙당 간부한테 3000달러를 주면 평양에 배치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권력자 집안 친구들은 성적 상관없이 다 좋은 데 간다. 주규창 전 제1부부장 손자인 친구도 대기권재진입체 연구를 하는 국방과학원 분원으로 갔다.”
―1년 8개월간의 탈북 준비를 어떻게 했나.
“2007년 국방대 졸업 후 고향 함흥에 내려간 뒤 가족을 돌본다는 핑계로 군수공장에 안 가고, 장사를 해 돈을 벌었다. 국경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중국이랑 거래한다는 사람들에게 술 사주면서 잘 해줬다. 친해지다 보면 탈북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게 돈이 얼마나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가장 빠르고 안전한 루트, 안전한 시기를 주문했다. 브로커가 그거에 맞게 해줬다.”
―탈북 과정은 어땠나.
“2009년 3월 함흥에서 떠났으나, 타이밍을 기다리다 보니까 북·중 국경 도시 무산에서 한 달을 살았다. 보위지도원이나 경찰이 순찰을 돌면, 다른 동네로 도망갔다. 북한이 그해 4월 5일 은하2호를 발사했다. 그러면 축제 분위기가 며칠간 이어진다. 언론 보도를 4월 8일인가 9일에 한다. 이때를 틈타 4월 9일 브로커가 알선해준 두만강 변 한 집에서 대기했다. 4월 10일 새벽 1시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단둥에서 배를 타고 탈북 3일 만에 한국으로 오게 됐다.”
―부모님은 왜 함께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만 계셨다. 내가 군수공장을 안 가니까, 어머니가 안타까워하셨다. 생각 바뀐 걸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말 해봐야 서로가 위험해지니까 얘기를 못 했다.”
―대한민국에서 정착하느라 힘들진 않았는지.
“초반에 힘들었다. 막연하게 짐작하긴 했으나, 한국 와보니까 체감하는 격차가 상당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모든 면에서 차이가 아득해서 보이지 않았다. 대학교 가서 수업을 들었더니 30%도 못 알아들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인정하기까지 한 달 걸렸다. 북한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그걸 내려놓고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탈북 8년 만에 박사학위 받고, 현대제철 책임연구원이라는 명찰을 달게 됐다. 북한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왔다. 흡수력이 최대치일 때인데도 그렇게 힘들었다. 대부분 탈북민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 입문 계기가 무엇인지.
“인재 영입 제안을 받고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5일 정도 있었다. 여느 젊은이들과 똑같이 내 집 장만, 결혼 등을 고민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민족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내내 있었다. 고민 끝에 탈북민, 안보 분야 등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겠다 싶어서 정치권에 들어오게 됐다.”
―꽃제비(노숙 아동) 출신과 엘리트 출신 탈북민 간의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다고 들었다.
“대학교 1~2학년 때는 시장에 있는 꽃제비를 꾸짖었다. 사지 멀쩡해서 왜 꽃제비를 하느냐, 나가서 일하면 먹고 살 텐데 왜 여기서 빌어먹고 있느냐고. 나중에 세상을 알고 나선 너무 미안했다. 공장에 가도 못 먹고 산다. 공장에서 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철이 없었다. 나중에 꽃제비 불쌍해서 돈을 쥐여 주고 그랬다. 꽃제비 출신 지성호 의원님의 열정 존경스럽다.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새롭게 시작하신 분이다. 그는 북한 인권단체 ‘나우(NAUH)’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 헌법, 국적법, 북한이탈주민법 등에 명시된 것처럼 탈북자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북한 어느 층 출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한 마음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을 4명이나 배출했다. 선배 의원들이 북한 인권 개선, 탈북민 안정적 정착, 남북관계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누가 되지 않도록 뜻을 함께하겠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