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서 많은 혜택 받아, 이젠 보답할 때…일본에서도 신진서 같은 초천재 나왔으면”
류시훈은 조남철-김인-조훈현-조치훈-조선진 등으로 이어져온 일본 유학파의 마지막 세대다. 1980년대 이창호 9단과 함께 연구생 시절을 같이 했던 그는 당시만 해도 바둑계 메이저리그였던 일본 무대에서 뜻을 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다. 1986년 15세 때 도일한 그는 오에다 9단 문하에서 1988년 입단했다. 이후 류 9단은 일본 7대 타이틀 중 하나인 천원 획득(1994년)을 시작으로, 천원전 4회 우승, 왕좌전 1회 우승, 기성(棋聖) 준우승, 본인방 준우승 등 성적을 거두며 일본 최정상급 기사로 활동했다. LG배 본선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리조트 검토실에서 오랜만에 류시훈 9단과 얘기를 나눠봤다.
전성기를 20년 건너뛰면서 소식이 뜸하던 그는 요즘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 하나씩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팬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일본기원에서 보급담당 역할을 맡고 있기에 바둑을 알리기엔 유튜브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일본 채널을 만들었고, 얼마 전 ‘류시훈의 바둑세계’라는 이름으로 한국 계정도 개설했다. 열심히 하고는 싶은데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일본기원에서 좀 멀다. 출퇴근에 왕복 4시간이 걸리니 생각만큼 많은 영상을 올리지 못해 아쉽다. 뭐, 거창하게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일본 채널에선 주로 10초 대국 위주로 해설하고, 한국팬들과는 예전 기보를 보며 와인도 한잔하면서 편하게 방송한다. 더 한가해지면 유튜브를 통해 팬들과 많이 소통하고 싶다.”
국내 팬들에게 류시훈 9단의 이미지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아마 동시대에 활약했던 조치훈 9단의 이미지가 워낙 선명했던 탓일 것이다. 혹시 섭섭한 마음은 없었을까.
“제가 성적을 많이 못 냈으니까(웃음). 돌아보면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또 과거의 일이니까 많이 잊었다. 그래도 한국에 오면 많은 분들이 아는 척해준다. 사람들이 일본에서 조치훈 선생과의 관계를 많이 묻는데 친하게 지냈다. 같이 술도 많이 마셨고 골프도 자주 쳤다. 그런데 일본에선 시합 있는 날 외에는 많이 어울리지 못했다. 조 선생도 시합이 없으면 일본기원에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한국이나 중국에서 열리는 국제시합에 같이 출전해서는 현지에서 많이 어울렸다. 무척 재미있는 분이다.”
골수 바둑팬이라면 류시훈 9단 하면 왕리청 9단과의 기성(棋聖)전 도전기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2002년 2월 21일, 일본랭킹 1위 기전인 기성전 도전7번기 5국. 타이틀 보유자 왕리청 9단과 도전자 류시훈 7단(당시)은 각각 2승씩을 나눠가진 상태에서 5국에 임했다. 승리하면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던 시점. 바둑은 종국 무렵 류시훈의 4집반 승리가 확정적이었는데, 순서대로 공배를 메우다가 그만 사고가 발생했다. 왕리청이 공배를 메운 수가 단수가 됐는데 류시훈은 이를 모르고 지나쳤고, 왕리청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돌을 우두둑 따내버린 것.
잠깐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승부는 뒤집어졌고 이어진 6국도 왕리청이 승리하면서 도전기는 왕리청의 4 대 2 승리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이 승부의 여파로 국내에선 공배도 수순이라며 ‘공배를 마지막까지 한 수씩 메워야 종국’이라는 규정이 새로 만들어질 정도로 화제가 된 대국이었다. 당시 아쉽게도 류시훈의 자세한 심경은 보도되지 않았는데 늦게라도 궁금해 물었다.
“물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만약 그때 기성 타이틀을 땄더라면 기사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당시는 어렸던 탓인지 별로 괘념치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다음 6국도 좋았는데 아깝게 졌던 기억이 있고, 다음해 다시 기성전 도전자결정전까지 진출했는데 야마시타 게이고에게 역전패를 당했던 게 더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온 목표가 일인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기성을 놓치면서 그걸 이루지 못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다.”
류시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해태배에서 우승하고 마침 한국기원에 연구생제도가 생겨 들어갔다. 당시 이창호 9단이 1위였고 류시훈이 2위였다. 그러면서 이왕 바둑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로는 가장 큰 무대였던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몇 년 후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이 세계대회를 휩쓸면서 세계바둑의 중심은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일본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프로기사 활동을 했다. 또 한국 바둑계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오히려 양쪽에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활동 폭이 더 넓어졌다고 본다. 그러니 이제는 받은 만큼 보답을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갈수록 바둑 인기가 쇠퇴해 아쉽다. 일단 일본에선 오는 7월이면 상무이사 임기가 끝나 기사회장을 맡게 될 텐데 앞으로는 어린이 바둑 보급에 주력하고 싶다.”
일본 바둑계는 현재 이야마 유타 9단, 이치리키 료 9단, 시바노 도라마루 9단의 삼두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후쿠오카 고타로 5단 등의 유망주도 있지만 국제 경쟁력은 여전히 약한 상태다. 묘책은 없을까.
“쉽지 않다. 한국도 올해 정부 바둑예산이 크게 줄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일본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많이 힘들다. 일본기원은 바둑잡지나 신문 등을 발간하는 출판사업을 통해 수익을 많이 올렸는데 최근 속속 폐간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무엇보다 바둑 인구가 많이 감소했다. 또 프로기사들의 연구 환경도 한국이나 중국보다 좋지 않다. 요즘은 신진서 9단 같은 초일류 기사들도 인공지능을 이용해 실력을 향상시키고 있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AI를 통해 초천재가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실현 불가능한 얘기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런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바둑보급에 주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