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투자자의 권도형 아파트 가압류 신청 받아들여…신현성 측 “백서에 루나 발행한도 제한 안 해” 항변
반면 신현성 씨 등은 사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백서 내용이 사기 혐의 근거가 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신 씨 변호인은 "백서는 (암호화폐) 프로젝트 핵심 작동 원리를 제시하는 학술적 문서"라며 "법률 규정이 없고 모든 내용을 백서에 담을 수도 없다"고 5월 27일 공판에서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 권도형 씨는 테라·루나 백서에 사실과 다른 공시를 했다"며 "백서에 실현 불가능한 내용도 포함돼 기망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와 주목된다. 법원은 테라·루나 투자자 4명의 권 씨 아파트 가압류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이같이 판단했다.
법원이 테라폼랩스의 사기 혐의가 소명된다고 구체적으로 판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법원은 2022~2023년 권도형, 신현성 씨 등 테라폼랩스 관계자 재산에 대한 검찰의 추징보전 청구를 받아들였다. 추징보전 명령은 민사소송에서 가압류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당시 법원은 추징보전 명령 이유를 구체적으로 판시하지는 않았다.
법원은 2022~2023년 신 씨 등 테라폼랩스 관계자 10여 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모두 기각했다. 당시 법원은 "객관적인 사실관계는 상당한 정도로 규명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일부 혐의에 다툴 여지가 있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테라·루나 투자자 4명은 폭락 사태 이후인 2022년 5월 19일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 권도형 씨, 신현성 씨 등을 형법상 사기, 유사수신행위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이어 2022년 5월 20일 권 씨가 소유한 서울 성동구 주상복합 아파트 갤러리아포레 가압류를 서울동부지방법원에 신청했다. 가압류는 채권자가 훗날 강제 집행에 대비해 채무자 재산을 미리 압류해 처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서울동부지법 민사제53단독은 테라·루나 투자자 4명의 가압류 신청을 2022년 6월 22일 기각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제53단독은 "채권자들은 형법상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인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권을 주장한다"며 "채권자들이 제출한 자료들만으로는 해당 법 위반 행위에 대한 배상의무자의 고의, 손해발생에 대한 인과관계 등이 충분히 소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테라·루나 투자자 4명은 가압류 기각 결정에 불복해 2022년 7월 6일 항고했다. 항고심 결과는 거의 2년 만에 나왔다. 서울동부지법 제1민사부는 항고를 받아들여 2024년 4월 25일 권 씨 아파트를 가압류한다고 결정했다.
가압류 결정문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제1민사부는 "채무자(권도형)는 2019년 4월 테라·루나 코인을 발행하기로 하고 백서를 공시했다"며 "백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테라 코인은 미화 등 기준 화폐 1단위 가치를 가진 루나 코인과 환전할 수 있다. 이로써 테라 코인은 기준 화폐의 1단위 가치에 수렴하게 된다. 루나 코인의 안정적인 수요 유지를 위해 10억 개 이상의 루나 코인은 소각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테라 코인은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동부지법 제1민사부는 이어 "암호화폐 매수자는 투자 결정 판단 기초가 되는 백서에 기재된 바와 같이 암호화폐가 발행, 유통, 소각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투자할 것"이라며 "암호화폐 발행자가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백서에 사실과 다른 공시를 하였거나 그 자체로 실현이 불가능한 내용을 포함한 경우 기망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또 "루나 코인의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루나 코인 발행량을 10억 개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런데 백서 내용과 다르게 10억 개를 훨씬 초과하는 6조 5303억 4202만 76개의 루나 코인을 발행했다"고 지적했다.
루나 코인은 2022년 5월 초까지 총 발행량이 7억 개 수준이었다. 테라 코인 가격이 떨어지면서 2022년 5월 11월 루나 코인 총 발행량은 26억 개로 급증했다. 이후 테라 코인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루나 발행량은 2022년 5월 12일 2118억 개, 5월 13일 4839억 개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른바 '죽음의 소용돌이'였다. 결국 테라·루나 코인 가치 모두 복구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서울동부지법 제1민사부는 "루나 코인 수요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지속 가능한 방안이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서에 그 자체로 실현이 불가능한 내용을 포함했다는 점도 소명된다"며 "결국 채권자들(테라·루나 투자자)은 백서를 신뢰하고 테라·루나 코인을 매수했다가 그 가치가 폭락해 손해를 입었다는 점이 소명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가압류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채권자(원고)에게 채무자(피고) 범죄 사실 증명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증명 대신 소명을 요구한다. 소명은 증명보다 낮은 정도의 심증이다. 법원은 구속영장을 심사할 때도 검찰에 범죄의 증명이 아닌 소명을 요구한다. 다만 구속영장 심사에서 피의자가 변론을 하는 것과 달리 가압류 사건에선 채무자에게 의견 진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재산 은닉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루나 폭락 사태와 관련해 자본시장법 위반과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신현성 씨 등 8명 재판에서도 백서 내용을 두고 공방이 펼쳐지고 있다. 재판에 넘겨진 테라폼랩스 직원 2명 변호를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백서를 자세히 보면 루나 발행 한도를 10억 개로 제한하지 않았다"며 "루나가 10억 개에 도달할 때까지 루나를 일부 소각한다고만 기재돼 있다"고 2023년 10월 30일 공판에서 주장했다.
신현성 씨 변호인은 "암호화폐 투자자는 백서 외에도 여러 경로로 정보를 취득하고 투자 판단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암호화폐 거래소 상장 신청서에 루나 코인을 10억 개로 한정한다는 기재는 없었다"고 2024년 5월 27일 공판에서 강조했다.
백서에 법적 효력이 없다는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테라폼랩스 전 개발자 A 씨는 "백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 보니까 (암호화폐) 프로젝트가 백서와 다르게 운영하는 건 비일비재하다"며 "백서는 계약서라기보다 계획을 정리해놓은 문서다. 계획은 항상 바뀔 수 있다. 업계에서 공통된 인식"이라고 2024년 5월 13일 공판에서 진술했다.
백서 내용이 기망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별개로 테라·루나 시스템에 루나 10억 개 한도 설정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직 테라폼랩스 개발자 B 씨는 "소스 코드에 루나 발행 한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고 2024년 4월 22일 공판에서 말했다. B 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선 "어느 순간 소스 코드에 루나 발행 한도가 사라졌다"고 말했다가 증인 신문 때 진술을 바꿨다.
항소 또 항소…권도형 언제 어디로 갈지 여전히 오리무중
테라폼랩스 공동창업자 권도형 씨가 몬테네그로에서 한국과 미국 중 어느 나라로 보내질지, 언제 보내질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몬테네그로 현지 소식을 종합하면 혼란 그 자체다. 몬테네그로 사법 체계가 제대로 갖춰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몬테네그로 고등법원은 2023년 11월 권 씨의 범죄인 인도를 승인했다. 송환국은 법무부 장관이 정한다는 전제였다. 권 씨 측은 송환국을 법원이 정해야 한다며 항소했다. 항소는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고등법원은 2023년 12월 한 달 전과 같은 결정을 다시 내렸다.
권 씨 측은 또 항소했다. 이후 고등법원은 2024년 2월 권 씨를 미국으로 송환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권 씨 측은 재차 항소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진 뒤 이뤄진 재심리 후 고등법원은 2024년 3월 권 씨를 한국으로 송환한다고 결정을 바꿨다.
이번에는 몬테네그로 검찰이 항소했다. 송환국을 법무부 장관이 정해야 한다는 반발이었다. 항소법원은 검찰 청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등법원은 2024년 4월 권 씨 한국 송환을 무효화하고 법무부 장관이 송환국을 정하도록 했다. 다시 다섯 달 전과 같은 결정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러자 권 씨 측 항소가 이어졌다. 항소법원은 2024년 5월 항소를 또 받아들였다. 항소법원은 이번에는 법무부 장관이 아닌 고등법원이 권 씨 송환국을 결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고등법원과 항소법원 재판부 모두 매번 다른 판결을 내리고 있다.
미국에선 권 씨에 대한 재판이 이미 진행 중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제기한 소송이다. 민사소송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뉴욕 남부법원 재판기록에 따르면 5월 29일 전화 회의에서 SEC와 권 씨 측 변호인은 "원칙적으로 합의에 도달했다"고 법원에 알렸다. 민사소송 배심원단은 지난 4월 권 씨와 테라폼랩스가 투자자들을 고의로 속였다고 판단했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