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지으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내놓아” 해명…조지호 서울경찰청장 등 농지 보유 논란
이런 가운데 이미 농지법 위반 의혹 등이 지적된 고위공직자들 상당수는 아직도 농지를 보유한 상태로 확인됐다. 비록 일부는 투기를 목적으로 한 농지 보유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엄격한 수준의 준법행위를 요구받는 고위공직자들로서는 적절치 않은 행보라는 비판이 따른다.
#농사 '직접' 짓겠다더니…
"공직사회 청렴 수준에 대한 국민과 공직자 사이 인식의 격차가 여전히 큽니다. 그러나 청렴의 판단 기준은 국민입니다. 따라서 공직자들이 청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솔선수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관행과 기준은 선제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가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유철환 권익위원장이 충남 당진시 공직자 약 500명 앞에서 이 같은 내용의 '청렴 특강'을 한 5월 31일. 일요신문은 강의가 열린 당진시청과 그리 멀지 않은 당진시 송악읍 봉교리의 한 땅을 찾아가 봤다. 지목상 농지(밭)로 2250㎡(680평) 규모인 이곳은 2020년 4월 17일 유 위원장이 약 1억 8000만 원을 주고 매입한 농토다.
유 위원장은 당진이 고향이긴 하나, 고교 진학 때부터 서울에서 지내며 농사를 지은 적은 없다. 현행법상 농지는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직접 농사를 지을 사람만 매입해 보유할 수 있다. '상속 농지' 등 극히 일부 경우에만 예외가 인정되므로, 유 위원장은 직접 농사를 지어야 위법 논란을 피할 수 있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유 위원장은 땅을 사들인 뒤 단 한 차례도 여기서 농사를 지은 적이 없었다. 이날 일요신문이 확인한 유 위원장 농지에는 양파 등이 심어져 있었다. 이를 재배·관리하는 60대 남성은 "서울의 한 변호사가 땅 주인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유철환 위원장이라는 사실은 몰랐다"고 말했다.
변호사 출신인 유 위원장은 1970~1980년대 신민당과 신한민주당 등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유제연 전 의원의 아들이다. 유 위원장 농지를 대신 관리해주는 이 남성은 "유제연 전 의원은 잘 안다"더니 "유철환 씨가 그의 아들이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어릴 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거듭 설명했다.
그는 '이 땅을 사용하게 된 계기' 등의 질문에는 "마을의 몇몇 사람들이 나더러 '네가 다 해먹어라' 하기에 그냥 쓰고 있다"면서도 "사실 수십 년 전부터 저희 집에서 농사짓던 땅인데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고 답했다. 또 "땅 주인한테 재배 작물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땅 주인이 누군지 몰라 못 보낸다"고 했다.
유 위원장이 해당 농지를 매입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유 위원장은 이 땅을 샀을 때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살았고, 법무법인 주원의 대표변호사이자 학교법인 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내고 있었다. 거주지만 봐도 농지와 거리가 약 90km에 이르러 현실적으로 농사를 짓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유 위원장은 땅을 사며 지방자치단체에는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땅 매입 당시 당진시 등에 제출한 '농업경영계획서'를 일요신문이 입수해 확인한 결과, 유 위원장은 노동력 확보방안에 '자기노동'을 명시했다. 영농 착수시기에는 '2020년 6월'이라고 기재했다.
투기성 여부가 단연 관심사지만 표면상 드러난 개발 계획은 없다. 단, 유 위원장의 농지는 당진IC 인근 도심 및 공업단지와 각각 3~4km씩 떨어져 있다. 차로 약 5분 거리다. 공시지가는 매입 때 평당 5만 600원에서 2022년 5만 7500원까지 올랐다. 2024년에는 5만 3700원으로 조금 낮아졌다. 유 위원장의 실거래가는 3.3㎡(약 1평)당 약 30만 원이다.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유 위원장의 농지는 '계획관리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는 관리지역 가운데 하나로서 '도시지역 편입'이 예상되는 등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 지역을 뜻한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농지에 투자할 경우 계획관리지역을 골라야 한다는 게 기본으로 받아들여진다.
유 위원장의 '농지법 위반 의혹' 관련, 권익위 관계자는 "매입 시점에는 전원주택을 짓고 농사도 정말 지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건강이 더욱 나빠진 까닭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면서 "결국 약 1년이 지나 다시 팔고자 내놓았으나, 부동산 경기 악화 등 때문인지 팔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투기 목적이 결코 아니고, 이익을 기대할 만한 개발 요소도 실제로 전혀 없는 곳"이라며 "위원장께서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의 학교가 가까운 곳이라 매입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워낙 팔리지 않는 땅이라 지금이라도 싼값에 구매하겠다는 쪽이 있다면 팔고자 내놓은 상태"라고 강조했다.
권익위는 2021년 LH 임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태 직후 여야 국회의원의 농지 등 부동산 투기 관련 전수조사도 벌인 반부패·청렴 주무기관이다. 이때 여야 각각 6명씩 총 12명의 농지법 위반 등 혐의를 적발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소명을 거쳐 혐의를 벗었으나, 상당수는 당에서 제명되거나 수사를 통해 처벌을 받았다.
#사과는 했지만 '처분'은 없다
권익위만큼 법과 원칙에 엄격해야 할 경찰에서도 농지법 위반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들이 잇따라 주목된다.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이 한 예다. 그는 경북 청송군 안덕면의 9610㎡(2907평) 규모 농지(논)를 보유하고 있다. 2014년 8월 부친한테서 증여 받은 땅이지만, 현행법은 증여받은 농지도 자경(자기 스스로 농사를 지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조 청장은 2022년 치안감 승진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지적 받았다고 알려졌다. 결국 그는 한국농어촌공사에 경작을 위탁해 가까스로 위법 소지는 피해갔는데, 적어도 농지를 보유한 2014년부터 치안감으로 승진한 2022년까지는 법을 어겨왔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현재 조 청장 농지는 매형 등 가족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조 청장은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 증여를 하셔서 저도 모르게 받게 됐는데, 치안감 승진 과정에서 농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에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농어촌공사에 위탁을 맡겼다"며 "농어촌공사가 다시 누나와 매형 등에게 경작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대부분의 경우 위탁 농지의 경작자는 '공개입찰'로 선정하고 있다"며 "젊은 청년 등이 있으면 우선 기회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조 청장 농지의 위탁 여부에 대해서는 "개인정보 관련 사안이라 확인해드릴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위공직자들의 농지법 위반 논란은 자주 불거져 왔다. 그러나 농지를 처분하는 결단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의 경우 강원도 평창에 2007년 1225㎡(370평) 크기 농지(밭)를 매입한 사실이 2023년 드러나자 "저의 불찰"이라며 사과를 했음에도 아직 땅을 보유하고 있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 역시 2005년부터 배우자 명의로 충남 태안군 2003.3㎡(605평) 규모 농지(논)를 보유해오다, 이 수석의 대통령실 대변인 임명 직전인 2023년 2월에야 땅을 이 수석 장모에 증여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의 '꼼수' 지적이 잇따랐지만, 현재까지도 해당 농지는 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이 수석 장모가 갖고 있다.
#2005년에 무슨 일이…
또 다른 특이점은 거주지와 먼 곳에 농지를 보유한 고위공직자들이 유독 2005년부터 농지를 매입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일요신문 확인 결과 이도운 수석 외에도 김유열 EBS 사장(제주도 농지 807평), 서효원 농촌진흥청 차장(강원 양양 농지 310평), 양종광 행정안전부 이북5도위원회 평안북도 지사(강원 평창 농지 330평) 등이 있다.
지난 정부에서 농지법 위반 의혹이 불거진 도종환 전 문체부 장관, 윤석열 대통령 장모 최은순 씨의 농지법 위반 논란을 일으킨 경기 양평군 땅 매입 시기도 2005년이다. 그 외 2021년 LH 임직원들의 투기 논란 당시 농지법 위반으로 적발된 사례에서도 2005년 문제의 토지를 사들인 이들이 많았다.
이는 2005년 농지법이 개정됐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법 개정으로 비농업상속인 및 이농자도 한국농어촌공사에 임대 등 위탁을 맡기면 1만㎡를 초과하는 농지 소유가 가능해졌다. 현재 제도는 농지를 3년 이상만 소유하면 농어촌공사에 맡겨 법망을 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처럼 손쉽게 농어촌공사 등에 위탁 가능한 구조는 속칭 '가짜농부'를 무분별하게 양산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2021년 기준 농어촌공사에 위탁한 농지는 1만 3603ha로 여의도 면적의 47배에 달했다. 위탁 농지 등기 원인은 매매 7739ha(55.6%), 증여 4722ha(33.9%), 상속 995ha(7.1%) 순으로 매매·증여가 전체의 약 90%를 차지했다.
한편, 2005년 농지를 매입한 이들은 '농지법 위반' 관련 질의에 여러 답변을 내놓았다. 서효원 농촌진흥청 차장은 "고향인 강원도에서 매입한 농지로서 현재는 농어촌공사에 위탁했다"고 밝혔다. 김유열 사장의 경우 EBS 관계자가 "질의 내용을 확인해 봤으나 개인사라 말씀드릴 수 없다"고 전했다.
양종광 지사 측은 "2005년에 귀촌을 목적으로 주택과 농지를 매입해 장인과 장모가 거주하며 농사를 지어왔다"며 "2022년 평안북도 도지사로 임명돼 공직에 오게 됐고, 장인과 장모 역시 나이가 연로한 까닭에 현재는 현지인에게 위탁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해명했다.
일련의 현상을 놓고 정지웅 변호사(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는 "농지법상 자경이 원칙인 이유는 농민의 경영안정은 물론, 농지를 목적대로 사용해 생산성을 올리는 게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고위공직자는 국민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 처신에 신중해야 하고, 누구보다 엄격하게 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씁쓸할 따름"이라고 지적했다.
당진=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