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권적 수사 경찰 8명 징계 1년 뒤 복직…피의자 44명 형사처벌 0명, 가해자 부모의 2차 가해도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이 다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에 집중되고 있다. 이에 2004년 불거진 이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으며 가해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되짚어 본다. 더불어 당시 경찰의 비인권적인 수사 상황도 함께 들여다본다. 다만 피해자 측의 아픔을 감안해 당시 피해 상황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최대한 피했다.
2004년 1월 울산에 사는 피해자 A 양(14)은 밀양에 사는 피의자 김 아무개 군(18)을 알게 됐다. A 양이 잘못 누른 전화번호가 우연히 김 군의 전화와 연결된 것이었는데 그렇게 ‘잘못된 만남’이 시작됐다.
몇 차례 전화 통화가 이뤄진 뒤 김 군이 A 양에게 만남을 제안했고, 이에 응한 A 양은 동생 B 양(13)과 함께 밀양으로 향했다. 당시 A 양은 김 군의 호의를 의심치 않았기에 김 군의 말을 잘 따랐다고 한다. 김 군은 A 양 자매를 친구들에게 소개했고, A 양은 고종사촌언니 C 양(16)을 이들에게 소개했다.
문제는 어느 날 남학생들이 A 양을 창원의 한 자취방으로 부르면서 시작됐다. 피의자들은 대부분 밀양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일반 고등학교 직업반 학생과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이 아닌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3학년이 된 뒤 창원의 공단으로 직업 위탁교육을 떠나 있었다. 그들은 창원에서 기숙사나 자취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한 자취방에 A 양 자매가 방문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 친절했던 남학생들은 이날 돌변했다. 강제로 A 양을 성폭행했고 반항하자 주먹과 흉기 등으로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됐다. 결국 A 양은 수면제 2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해 이틀 만에 깨어났다. 이를 계기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A 양 가족은 2004년 11월 25일 경찰에 신고했다.
A 양 가족의 신고전화는 11월 25일 오후 7시 53분 울산남부서 112 지령실로 접수됐다. 경찰은 신고자 거주지와 가까운 지구대에 연락해 바로 신고자 면담에 들어갔고 바로 사건을 울산남부경찰서 형사과로 넘겼다. 울산남부서 강력계는 바로 이날 저녁 9시부터 26일 오전 9시까지 A 양 어머니와 친척이 입회한 가운데 1차 피해자 조사를 벌였고 26일 피해자 친척 집에서 2차 조사, 12월 3일 3차 조사를 진행했다.
경찰의 피의자 검거는 12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저녁 창원시 중앙동 소재의 PC방과 밀양 등에서 범행 가담자 41명을 검거했다. 경찰은 12월 8일 주범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11일에도 1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법원은 8일 신청된 3명 전원과 11일 신청된 14명 가운데 9명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5명은 성폭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해 구송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 이렇게 경찰은 41명 가운데 12명을 구속 입건하고 29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이처럼 경찰은 발 빠르게 수사를 진행했지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인권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A 양 측은 신고 당시부터 ‘비공개 수사’와 ‘철저한 신변 보장’을 요구했다.
지구대는 신고받은 사건을 울산남부서 형사과로 넘긴 이유에 대해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A 양 가족에 따르면 경찰에 비공개 수사를 요청하자, 좁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지구대에선 비공개 수사가 어려워 모텔에서 피해자 조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A 양 가족이 “여중생에게 무슨 모텔이냐”며 거부하자 울산남부서 형사과에서 조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세 차례의 피해자 조사 과정도 문제였다. A 양 측은 여자 경찰의 조사를 요청했지만 처음에만 여경이 참여했다가 곧 돌아갔고 주된 조사는 남자 형사들이 진행했다. 어린 중학생이 남자 형사들에게 참혹했던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것 자체도 힘겨운데 남자 형사들로부터 “네가 먼저 꼬리친 것 아니냐” “네가 밀양 물을 다 흐려놓았다” 등의 폭언까지 들었다.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진 직후인 2004년 12월 7일 오후 경찰은 울산남부서 형사과 사무실에 남학생 10여 명을 일렬로 세워 놓은 뒤 A 양을 데려와 성폭행 가담자들을 지목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피해자의 신변 보장이 전혀 지켜지지 않은 터라 이날 A 양은 경찰서 후문에서 피의자 가족들에게 “신고해 놓고 제대로 사나 보자” “몸조심해라” 등의 협박까지 받았다.
피의자 대질심문 과정에선 피의자 41명과 피의자 가족들 수십 명이 피해자 A 양, A 양 가족과 사무실에 함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피의자 가족이 A 양 등 피해자들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또한 경찰은 약속과 달리 언론에 사건 경위와 피해자 신원 등을 고스란히 노출했고 바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왜 피해자 가족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나. 우리가 지금 피해 입은 건 생각 안 하나” “딸자식을 잘 키워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여자애들이 와서 꼬리치는데 거기에 안 넘어가는 남자애가 어디 있나” “억울하다. 사람들이 지금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것 아니다” 등이 당시 피의자 가족들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는 2022년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2’에 소개돼 다시 화제가 됐다.
경찰은 사건을 부풀리기에 바빴다. 당시 경찰은 기자들에게 배포한 자료 등에서 A 양의 동생 B 양과 고종사촌언니 C 양 등도 성폭행당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B 양과 C 양은 폭행을 당하고 금품을 빼앗기긴 했지만 성폭행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피해자와 피의자 진술을 통해 드러났다.
경찰은 피의자들이 고교생 범죄동아리 ‘밀양연합’ 소속이라고 밝히며 “범죄단체 구성 혐의도 집중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피의자 대부분은 밀양연합이라는 말을 경찰 조사에서 처음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검거한 41명 외 미검자 75명에 대해 추적 중이라고 밝혔지만 별다른 수사 성과는 없었다. 12월 22일 피의자 3명을 추가 입건한 것으로 수사는 종결됐다. 그렇게 피의자는 44명이 됐다.
당연히 여론은 분노했다. 12월 11일 저녁 ‘가해학생 규탄 및 경찰 수사 항의’ 촛불집회가 서울 종로 교보빌딩 후문 앞에서 열렸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강지원 변호사가 무료로 법률대리를 맡는다고 밝혔다.
과연 피의자 44명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 한 명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44명 가운데 10명만 기소하고 20명은 보호처분으로 전과가 기록되지 않는 소년부에 송치했다. 심지어 13명은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고소장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으로 풀어줬다.
이 과정에서 A 양의 아버지는 피의자 가족들에게 합의서나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를 써주고 합의금으로 5000만 원을 받았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5000만 원 가운데 1500만 원은 A 양 아버지가 전셋집 마련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친척들과 나누어 가져 A 양 자매에게는 한푼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13명이 공소권 없음으로 풀려났다.
소년부 송치 20명 가운데 16명은 봉사활동 및 교화처분을 받고, 단 4명만 소년원 1년을 받았다. 기소된 10명 역시 울산지법이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렸다. “인격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교화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울산지법의 소년부 송치 이유였다.
당시 무리한 수사를 진행한 경찰들에 대한 징계도 이어졌다. 비인권적인 수사 등을 이유로 8명의 경찰이 징계를 받은 것. 그렇지만 1년 뒤 그들은 모두 복직했다.
그나마 경찰의 모욕적인 수사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묻기 위해 진행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2007년 3월 서울고등법원이 A 양 자매에게 각각 3000만 원과 1000만 원, 어머니에게 1000만 원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고, 2008년 6월 대법원이 이 판결을 확정했다.
사건 이후 A 양 자매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모친과 함께 살았다. 어렵게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전학을 했지만 끝내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한 가해자 부모가 A 양이 다니는 고등학교까지 찾아와 소년원에 있는 아들 탄원서를 써달라고 한 것에 충격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2014년 개봉한 영화 ‘한공주’를 통해 다시 한 번 세간에 적잖은 충격을 전해준 바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