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의 물러섬 없는 정치 전쟁 드라마…“설경구와 세 번째 인연, 그를 싫어하는 배우는 없죠”
“또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이 정수진이란 인물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행복한 작업이었어요. 사실 처음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욕심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이 방대하고 빠른 대사를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겠단 생각만 했죠(웃음). 그러다 정수진의 서사에 몰입하면서 감정이입이 시작됐어요. 원래는 이 작품이 그저 ‘박동호의 드라마’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정수진은 페이스메이커인 상대역일 뿐이라고 접근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정수진도 박동호와 같이 커가더라고요(웃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분)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강대강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김희애가 맡은 정수진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정치를 시작했지만 권력의 유혹 앞에 무너지면서 결국 대통령과 함께 부패하며 스스로의 정의를 저버리게 된다. 얼핏 보면 악인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회를 거듭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부패한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비난보단 한 인간의 인생에 인간적인 동정이 들기도 한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땐 정수진이 박동호를 괴롭히는 악당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서사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너무 안 된 거예요(웃음). 악당이 아니라 시대가 낳은 괴물이고 피해자라 더 정이 가고, 그저 나쁘기만 한 인물로는 보이고 싶지 않더라고요. 사실 수진은 원래 되게 정의로운 여자였거든요(웃음). 그랬는데 이렇게 되고 만 거죠.”
‘돌풍’을 쓴 박경수 작가는 박동호가 가진 신념을 ‘위험한 신념’, 정수진이 가진 신념을 ‘타락한 신념’이라고 정의했다. 어느 쪽도 자신의 신념을 한 줌도 덜어낼 생각조차 없지만, 그러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길의 끝을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현실에 순응해 부패해야만 했던 자신을 정당하다 여기면서도 그 대척점에 있는 박동호에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정수진에 대해 김희애는 “아마도 정수진은 박동호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수진은 마음속으로 박동호를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박동호처럼 되고 싶어 했고요. 정수진은 남편으로 인해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또 남편으로 인해 부패하게 된 인물인데 본래는 굉장히 정의로웠거든요. 그래서 박동호처럼 되고 싶었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을 디딜 때마다 계속해서 괴물이 돼갔던 거죠. 그 사람도 사실은 잘하고 싶었을 거예요. 이건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웃음).”
정수진을 연기할 때마다 매번 그에게 다시 한 번 빠져드는 것이 불가항력이었다는 김희애는 이런 권력 전쟁의 정치물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을 가장 높이 샀다. 주인공의 대척점에 있는 악당이나 어느 정도 성적인 매력을 가진 조력자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과 동등한 야망과 능력을 가진 채 대치할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품격을 한 층 더 높인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경제부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이라는 굉장히 높은 위치까지 가는 게 최근 작품에서 잘 없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런 권력욕으로 남자와 당당하게 맞서 끝까지 간다는 데서 오는 쾌감과 대리만족이 있었죠. 그래서 최대한 박동호에게 정수진으로서 지지 않으려 했어요(웃음).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기도 했고요. 정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치인으로서의) 톤 앤 매너를 가져가려고 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인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그런 이미지가 깨지니까 최대한 그 범위 내에서 하려 했죠.”
정수진이 생생한 인물로서 살아 숨쉬는 데에 상대인 박동호가 불어넣어 준 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경구와 영화 ‘더 문’(2023), ‘보통의 가족’(2024년 개봉 예정)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세 번째 인연이 맺어지며 호흡을 맞추게 됐으니 ‘척하면 척’의 케미스트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게 김희애의 이야기다.
“저희 배우들은 인연이 안 되면 현장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아마 이렇게 되도록 만드는 인연이 있었나 봐요(웃음). 설경구 배우하고 일하는 걸 싫어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그러니 연달아 세 번을 한 저는 정말 행운이었죠. 사실 세 번이나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지난 작품을 찍을 때 마지막 촬영 날 제가 설경구 씨한테 ‘다음 작품 뭐 잡히셨어요?’ 물어보니까 ‘없어요, 놀 거예요’ 그러시더라고요(웃음). 그 말을 듣고 저희 매니저한테 ‘그분 일 없으시대. 이거 제안해 보자’ 하고 대본을 드렸는데 바로 출연을 결정해주셨어요. 그게 또 인연이 됐지만, 사실 작품이 재미없었다면 하셨겠어요(웃음)?”
이번 작품으로 설경구와 다시 호흡을 맞추며 김희애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상대를 받쳐주는 연기”라고 완벽하게 정의했다. ‘김희애가 하는 연기’에서 더 나아가 ‘김희애가 함께 하는 연기’를 선택하게 된 지 꽤 오래 됐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영화 ‘스무해 첫째날’(1984)로 데뷔하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은 ‘나의 연기’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 집착할 때를 이미 훌쩍 지나고도 남았다고 말한다. “그저 멈추지 않고 달렸더니 그 시간이 40년이 지났을 뿐”이라는 김희애는 이제 좋은 배우라는 대중적인 타이틀을 넘어 배우들에게 ‘좋은 상대역’으로 남고 싶다고 희망했다.
“제 연기는 이제 충분히 한 것 같아요. 이제는 제 상대역들을 받쳐줄 차례죠. 상대 배우들이 ‘김희애랑 연기하면 연기가 잘 나와’ 이렇게 되면 좋겠어요. 최대한 상대 배우에게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마음을 곱게 써야겠죠(웃음). 옛날엔 시청자들, 연출진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 앞의 배우에게 먼저 감정을 공유하고 싶더라고요. 그게 또 좋은 선순환이 되기도 해요. 상대가 편안해지면 그 분위기가 제게 반사되고, 그 연기가 터지면 시청자들이 감동을 받는 식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지금 제가 저격하고 있는 목표는 그거예요. ‘상대 배우에게 가장 좋은 상대역이 되자’.”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