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아닙니다만’과 넷플릭스 순위권 나란히 입성…“‘얘가 얘였어?’ 20년 배우 인생 최고의 칭찬”
“세라에게 전사가 없는 상태다 보니 연기하기 전에 어느 정도 불안함이 있긴 했어요. 제가 이 인물을 구축하는 데 있어 정서적이거나 관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일절 없었던 거니까요(웃음). 정해진 그 안에서 가지고 있는 단서만을 가지고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야 했는데, 반대로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던 게 이 캐릭터가 너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어떤 전사를 갖다 붙여도 다 이야기가 돼서 마음이 놓였죠.”
‘디 에이트 쇼’는 삶의 벼랑 끝에 몰린 8명의 인물이 8층으로 나뉜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혀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쇼에 참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천우희가 연기한 송세라는 현실에선 업계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몰락한 행위 예술가지만, 이 쇼에서는 가장 최상위층인 8층을 손에 넣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리게 된다.
물질적인 빈곤에 허덕이며 오직 돈만을 원하는 다른 출연자들과 달리 자극과 인정이라는 정신적인 욕구를 갈망해 온 그에게 있어 ‘디 에이트 쇼’ 속 환경은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다.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해 인간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소리 내 웃고 즐거워하며 “난 이곳에서 영원히 있고 싶다”고 외치는 송세라의 모습은 과장됐기에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과장된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지나친 반감을 안겨주지 않도록 적절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천우희에게 있어 첫 번째 숙제였다고 했다.
“사실 부담감이 없진 않았어요. 모두가 불편해야 하는 인물의 결이 있는데 세라라는 캐릭터에 너무 충실하다 보면 어떤 피로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굉장히 튀는 캐릭터다 보니 사람들에게 딱 각인이 될 순 있지만 오래 보면 볼수록 비호감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죠. 그 중간을 잘해나가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저 혼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8명이 다 같이 나오는 장면이 많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감독님이 원하는 방향성을 타협해 만들어진 게 지금의 결과물인 것 같아요.”
작품 속 캐릭터와 현실의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성격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나 이 지점이 가장 중요했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미쳐가는 사람들을 보며 기쁨에 못 이겨 악의 없이 박장대소하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다 보니, 배우 입장에서도 그 모습에 ‘학을 떼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세라의 즐거움을 유지하는 게 진짜 쉽지 않더라. 차라리 (다른 캐릭터들처럼) 몸을 쓰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세라는 의도가 없어서 더 무섭게 느껴지죠(웃음). 저희가 한 공간에 8명이 같이 있다 보니 이 쇼에 정말 제가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굉장히 몰입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저는 세라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이 상황을 즐기면서 해야 하지만 사실 제 성향 자체가 누군가 괴로워하는 걸 즐겁게 볼 수 있는 강한 인물은 또 아니거든요(웃음). 그래서 저의 본래 자아와 8층으로서 세라의 자아를 최대한 분리하려고 ‘나는 이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라며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면서 연기했죠(웃음).”
행위예술가라는 직업, 그리고 쇼 안에서 가장 많은 부를 획득하는 8층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세라는 유일하게 다양한 착장을 선보이며 시간이 갈수록 꼬질꼬질해지는 다른 참가자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현실에서도 구하기 힘든 명품 옷들을 자신의 시간을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척척 사들이는 그를 연기하며 촬영장 안에서 천우희 역시 평생 입을 명품 브랜드 제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고 했다.
“현장에 정말 많은 물량의 명품 브랜드 옷과 독특한 의상들이 있었어요(웃음). 나중엔 옷을 너무 많이 갈아입다 보니 제 개인 스타일리스트에게까지 도움을 받아서 공수해 와야 했죠. 그 많은 의상들 중에서 작품에서 보이는 건 감독님이 선택하신 게 대부분이었어요. 그렇게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는 건 저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고요. 그 가운데 세라를 가장 잘 표현해 냈던 건 첫 등장의 그 웨딩드레스였던 것 같아요. 웨딩드레스를 입고 전시장에서 행위예술을 하다가 이 쇼가 펼쳐지는 장소에 들어와서 보였던 첫 모습이니까요. 이 인물을 표현하는 데 사람들에게 가장 잘 각인될 수 있는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디 에이트 쇼’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천우희는 같은 시기 방영 중인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는 판타지가 가미된 달달한 로맨스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중이다. 넷플릭스 한국 시청 순위에 두 작품 모두 상위권으로 올려놓은 장본인인 만큼 이렇게 ‘천우희가 천우희를 상대하는’ 기분 좋은 경쟁에 어깨가 으쓱해질 법도 해 보인다. 햇수로 따진다면 올해로 딱 20년을 맞이한 배우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새롭지 않은 것을 추구한 적이 없다는 천우희는 대중들에게 늘 듣고 싶은 칭찬으로 이번 두 작품을 통해서도 그랬듯, “얘가 얘였어?”라는 말을 꼽았다.
“예전부터 제게 있어서 가장 좋은 칭찬이 그거거든요(웃음). 제가 배우로서 어떤 만족감이 들 때도 제 모습은 없고 그 인물 자체로 비춰질 때예요. 이번에도 ‘히어로는 아닙니다만’과 ‘디 에이트 쇼’가 넷플릭스 순위에 같이 올라와 있는 걸 보시고 ‘동일인물이 맞냐, 한 사람이 연기했다는 게 놀랍다’는 댓글이 있더라고요. 너무 뿌듯했어요(웃음). 이제까지 연기는 새로움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하는 거라고 느꼈는데 요즘은 제가 저를 더 잘 알아가고 싶어서 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어요. 타인에게 신선함과 즐거움, 영감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나도 그것들을 다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늘 새로운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