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루키 리그에서 승격…“KBO 건너뛴 선택 후회 없다”
경기상고 재학 당시 고교 포수 랭킹 1위로 평가받았던 엄형찬은 2022년 7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입단 계약을 맺고 2023시즌 루키리그를 소화했다. 그러나 애리조나 콤플렉스리그에서의 엄형찬은 15경기 타율 0.220에 그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2023시즌을 마친 엄형찬은 비시즌 동안 호주프로야구 브리즈번 밴디츠에서 뛰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했고, 그 노력은 올 시즌 싱글A 승격으로 이어졌다.
7월 1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엄형찬을 만났다. 엄형찬을 만난 곳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탬파베이 레이스 싱글A팀인 리버독스 홈구장이었다. 엄형찬이 속한 싱글A 팀은 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 싱글A 팀인 컬럼비아 파이어플라이스 팀이다. 항상 밝은 얼굴로 긍정 에너지를 선사하는 엄형찬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팀에 합류한 지 3주 정도 지났고, 홈구장에서 3경기 정도만 소화하고, 계속 원정 경기를 다니고 있어 정신이 없다”며 밝게 웃는다.
엄형찬이 캔자스시티 입단 후 줄곧 머문 곳은 서부 지역의 애리조나였다. 애리조나와 동부 지역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시차가 3시간 난다. 엄형찬은 3주 전 생활 터전을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한 터라 적응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경기 출전이 계속되다 보니 시차를 느낄 겨를이 없다고 한다.
엄형찬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루키리그를 ‘졸업’하고 싱글A로 승격한 배경에는 지난 시즌에 비해 공격과 수비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2023시즌 타율 0.220 15경기 11안타 5타점 7볼넷 15삼진 OPS 0.625를 기록했다면 2024시즌에는 루키리그와 싱글A 성적을 합해(7월 19일 현재) 타율 0.293 39경기 41안타 22타점 21볼넷 38삼진 OPS 0.853을 올렸다. 엄형찬은 이런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난 시즌을 힘들게 마무리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스스로 적응했다고 믿었는데 아무래도 미국 생활 1년 차고 야구 문화의 차이가 있다 보니 적응하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성적은 부진했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기술적, 정신적으로 많은 걸 배웠다. 오히려 더 겸손해지는 시간이 됐다. 신앙인이라 기도 많이 하면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엄형찬은 시즌을 마치고 오프시즌 동안 알찬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파워를 키우려고 벌크업을 시작했고, 더 많은 경기 경험을 쌓고 싶어 구단의 허락을 받고 호주리그(ABL)로 향했다.
“경기 출전 기회가 많으면 실력이 늘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비시즌 동안 쉴 수가 없었다. 웨이트 트레이닝하면서 시합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찾다가 호주행을 결심한 것이다. 브리즈번 밴디츠 소속으로 활약했는데 거기서 NC 다이노스의 한재승, 박시원, 임형원 선수를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NC 다이노스는 2023년 11월 6일 ABL 명문 구단 브리즈번 밴디츠에 선수 3명과 트레이너 및 국제업무 스텝 2명을 파견한 바 있다. ABL에는 KBO, NPB, 미국 마이너리그 등 다양한 나라의 유망주들이 모인다. 엄형찬은 “그런 좋은 선수들과 경쟁한 경험들이 실력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호주리그를 마치고 2월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엄형찬은 소속팀 감독, 코치, 팀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았다.
“스프링캠프 끝날 즈음에 감독님, 코치님께서 내게 ‘네가 제일 많이 성장한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칭찬해주셨다. 실력이 엄청 늘었다면서 말이다. 호주리그에서의 경험들이 자신감을 갖게 했다. 올 시즌이 시작됐을 때는 경기 나설 때마다 두려움 없이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엄형찬은 올 시즌 루키리그 2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0 4홈런 16타점 출루율 0.400 장타율 0.500을 기록했다. 6월 25일(한국시간) 캔자스시티 로열스 구단 선수 육성 부서는 엄형찬이 루키 레벨인 애리조나 콤플렉스리그 로열스에서 싱글 A 콜럼비아로 승격됐다고 발표했다.
“구단 발표 전에 래리 서튼(루키리그) 감독님을 통해 소식을 미리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쉬는 날이라 쇼핑센터에 가려고 나섰다가 서튼 감독님이 잠깐 볼 수 있느냐고 연락을 주셔서 살짝 기대를 갖고 감독님을 만났다. 시즌 중 감독님의 호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튼 감독님이 내게 싱글 A인 콜럼비아로 가게 됐다고 말씀해주실 때 정말 기뻐했다.”
엄형찬은 자신의 노력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구단에서도 엄형찬의 승격을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선수들도 엄형찬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성장과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올 시즌 루키리그 감독님이 바뀐다는 걸 알고 있었고, 새로 오신 감독님이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던 래리 서튼 감독님이란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러다 스프링캠프에서 감독님을 처음 만났는데 롯데 자이언츠 가방을 들고 오셔서 정말 신기했다. 한국 문화를 잘 알고 계셔서 미국 생활하는 내게 또 다른 시선으로 조언해주신 점을 잊지 못한다. 감독님도 나의 콜업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고, 싱글 A로 온 지금도 서튼 감독님과 계속 문자 주고받으면서 연락하고 있다.”
일반인의 시선에선 ‘아직’ 싱글A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엄형찬은 빌드업 과정 중이고, 싱글A 승격 후에도 거의 매 경기 안타를 생산해내면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싱글A 야구장을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팬들도 많이 오고, 더 좋은 야구장에서 쟁쟁한 선수들과 경쟁을 벌인다는 게 재미있다. 확실히 투수들 실력이 뛰어나다. 루키리그의 투수들이 조금 거칠다면 싱글A 선수들은 좀 더 다듬어진 제구를 자랑한다. 타석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투수들 구위가 좀 더 눈에 익다 보면 지금보다 더 편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엄형찬에게 미국 진출 후 단 한 번이라도 KBO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장 미국으로 향한 데 대한 후회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엄형찬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힘들다고 해서 지난 선택을 후회하는 어리석음보다 그걸 이겨내는 과정을 즐기며 성장하고 싶다. 모든 선수들은 시련을 겪는다. 그 시련이 왔을 때 반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나는 루키리그에서 부진한 성적과 부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도 경험해야 성장하는 게 아닌가. 힘든 일이 생기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시간들을 경험하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엄형찬은 고교 3학년 시절 김범석(LG), 김건희(키움)와 함께 포수 ‘빅3’로 불렸다. 엄형찬이 KBO 신인 드래프트에 나섰다면 1라운드 지명이 예상됐을 정도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터라 아주 조금이라도 KBO리그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엄형찬은 기자의 고정 관념을 단숨에 무너트렸다.
“나는 KBO리그에서 활약하는 동기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다들 때가 있는 게 아닌가. 힘든 일도, 잘나가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이기에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엄형찬은 싱글A 승격 후인 7월 2일(한국시간) 콜럼비아 파이어플라이즈 홈구장인 시그라 파크에서 싱글A 첫 홈런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경기상고 엄종수 코치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시절 바로 그 야구장에서 첫 홈런을 터트렸는데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야구장에서 싱글A 첫 홈런을 터트렸다고 설명한다. 정말 기막힌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엄형찬의 목표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포수가 되는 것이다. 엄형찬에게 그 꿈이 멀게 느껴지느냐고 묻자, 엄형찬은 “이렇게 조금씩 올라서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턱에 이를 것”이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답한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