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이도류 원조’… 왕정치 “제의 받고 기분 나빴다” 털어놓기도
그사이 보스턴 구단은 틈틈이 엿보였던 루스의 타격 재능을 그대로 묻어두기엔 아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1918년 5월부터 루스를 타석에도 세우기 시작했다. 그해 루스는 투수로 정규시즌 18승을 올리고 월드시리즈 두 경기에 선발 등판하는 한편, 타자로서도 5할에 육박하는 타율(0.484)에 11개의 홈런을 때려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등극했다. 현재 빅리그에서 '이도류(二刀流)' 열풍을 일으키면서 LA 다저스와 10년 총액 7억 달러(약 9641억원)에 계약한 오타니 쇼헤이의 '원조'가 바로 루스였던 셈이다. 다만 루스는 자신이 선발등판하는 경기에선 투수에 전념하고, 마운드에 서지 않는 날에만 1루수나 외야수로 출전했다는 게 오타니와의 차이점이다.
루스는 또 이듬해인 1919년 급기야 29홈런을 기록해 2위를 3배 가까운 격차로 앞질렀다. 그러나 돈이 필요했던 보스턴 구단주는 1920년 개막을 앞두고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았다. 당시 루스의 몸값은 12만 5000달러였다. 루스는 양키스로 이적한 뒤 본격적으로 타격에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1920년 54홈런과 1921년 59홈런을 각각 때려내면서 홈런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MLB에서 '투수의 시대'가 저물고 '홈런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일본에서는 왕정치가 성공 시대를 열었다. 그는 1959년 당시 일본 프로야구 고졸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인 1800만 엔과 연봉 144만 엔을 받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투수로 입단한 유망주였다. 부드러운 투구폼이 일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즈하라 시게루 당시 요미우리 감독은 다짜고짜 "넌 투수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혹평했다. 프로에서 성공할 만한 특장점이 없는 데다, 고교 시절 너무 많은 공을 던져 이미 힘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얘기였다.
왕정치가 오히려 배팅 훈련 때 놀라운 가능성을 보이자 미즈하라 감독은 끝내 야수 전향 지시를 내렸다. 왕정치는 훗날 "투수를 포기하라는 얘기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결국 이 결정이 '신의 한 수'가 됐다. 왕정치는 대부분 투수에게 주어지는 등번호 1번을 단 채로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정규시즌 MVP 9회를 수상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 시즌 50홈런을 세 번이나 돌파했는데, 그 가운데 한 번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던 35세의 나이에 만들어낸 기록이었다. 정형화되지 않은 특유의 외다리 타법이 왕정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가 그때 공을 놓고 배트를 들지 않았다면,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홈런 868개가 사라질 뻔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