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맞이 조직개편 ‘판사에게 물어봐’
▲ 지난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만났다. 왼쪽부터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사면 논의 같은 법무 권력의 향배에 대해 4대 재벌 총수들이 그저 남 얘기나 할 처지는 아닐 것이다. 이들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사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일각에선 “4대 재벌 총수들의 신년 초 운신의 폭을 판사님들이 좌지우지할 것”이란 이야기마저 들려온다. ‘판사님’들의 선고 내용에 따라 4대 재벌 총수들의 입지는 물론 해당 그룹 내 대규모 인사와 조직개편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다. 신년 벽두부터 사법부를 향해 4대 재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은 초조한 심경으로 1월 18일을 기다리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 허태학 박노빈 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날인 탓이다. 허태학 박노빈 씨에 대한 재판결과도 중요하지만 검찰이 그동안 공언해온 ‘에버랜드 재판 이후 이건희 회장 소환’ 시나리오의 현실화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2005년 10월 1심 재판부는 허태학 박노빈 씨의 유죄를 인정해 허 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박 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건희 회장 자녀들이 적절한 세금을 내지 않고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받게끔 해서 회사에 최대 2709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 검찰의 논리다. 검찰은 지난 12월 7일 결심공판에서 1심 재판부의 선고내용보다 높은 형량을 구형했다. 허 씨에게 징역 5년, 박 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한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재판결과에 대해 검찰 안팎과 관련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 대기업 정보 담당자들, 그리고 여러 정보기관원들 사이에선 그럴 듯한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허태학 박노빈 씨가 1심 결과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아진 형량을 선고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유죄 판결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이 여론의 뭇매를 맞아온 점을 고려하면 에버랜드 경영진에게 면죄부를 덥석 쥐어주긴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에 대한 재판결과보다는 이건희 회장 소환 여부에 사람들의 궁금증이 더 많이 쏠려있다. 검찰은 이건희 회장 소환 시기를 계속해서 늦춰왔다. 지난해 초만 해도 ‘허태학 박노빈 씨 2심 선고 시기와 무관하게 이건희 회장 소환 시기가 결정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았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로 접어들면서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에 대한 2심 공판 이후 이 회장 소환이 결정된다’는 논리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렇다보니 검찰 안팎에선 벌써 ‘이 회장 소환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일단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들이 유죄 선고를 받고난 뒤 민감한 정치일정과 국내 기업의 대외적 위상 문제 등이 맞물려 이 회장 소환 논리가 희석될 것이란 분석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과 재벌 회장들 간 회동 이후 이 회장이 ‘김우중 전 회장 사면’ 문제를 운운하며 대외 활동 폭을 넓히는 점도 이 같은 자신감의 발로라는 지적이 뒤따른다.
이 회장 소환 문제가 수그러든다면 1월 중으로 예정된 삼성그룹의 정기 임원인사는 소폭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 회장 아들인 이재용 상무가 경영권 승계 수업을 위해 전무로 승진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친 이재용’ 인맥 중 일부가 그룹 홍보라인에 수혈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 회장 소환 문제가 잠잠해질 경우 검찰과 법원의 족쇄에서 풀려난 이 회장이 이재용 상무로의 안정적 승계 가속화를 위해 큰 칼을 뽑아들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이학수 부회장이나 윤종용 부회장 같은 대표적 임원들의 자리 수성론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한편 이 회장 소환이 현실화될 경우엔 후폭풍 기상도도 그려볼 수 있다. 삼성 임원 인사 이전에 이 회장 소환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지만 2월 쯤 공개소환이 이뤄진다면 3월이나 4월께 책임을 묻는 대규모 인사가 일어날 여지도 있다. 철옹성 같던 이학수 부회장이나 윤종용 부회장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다. 허태학 박노빈 씨 형량이 삼성 측 예상보다 더 높게 책정되고 이 회장 소환이 현실화된다면 ‘이재용 시대를 위한 세대교체’라는 미명하에 삼성의 노신(老臣)들이 옷을 벗게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삼성그룹 못지않게 현대차그룹 또한 재판부의 눈치를 살펴야 할 입장이다. 현대차 비자금 사태로 기소된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현대차 주요 경영진은 오는 1월 16일 검찰의 첫 구형을 받고 1월 29일 1심 선고공판을 받게 된다. 검찰이 정 회장에게 어느 정도의 형량을 구형할지, 재판부는 결심공판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에 양재동 현대차 사옥의 안테나가 곤두서있을 수밖에 없다.
검찰 안팎과 재계 인사들에 따르면 정 회장에 대한 검찰 구형은 허태학 박노빈 씨 형량 이상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1심에서 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집행유예가 가능했던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의 경우와 달리 1심에서 정 회장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을 가능성을 쉽게 점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2006년 최대의 개가로 꼽고 있다. 검찰 입장에선 최대 치적으로 자평하는 현대차 사건 재판에서 정 회장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될 경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서 ‘재판부가 1심에서부터 정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형량을 검찰이 구형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정 회장 측의 기대와 달리 집행유예 이상의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면 현대차는 비상체제에 돌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 회장 아들인 정의선 사장에 대한 승계작업에 탄력을 붙이기가 간단치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인사범위도 소폭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재판부의 기류가 현대차에 대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원은 론스타 영장기각 사태 등으로 검찰과 맞각을 세워왔다. 에버랜드 재판 전례에서 볼 수 있듯 검찰의 구형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 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 회장이 구속수감되는 굴곡을 겪었던 점이나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과의 형평성 논란이 불거졌던 점을 고려해 재판부가 정 회장의 대외 활동을 옥죄는 선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널리 퍼져있다.
이럴 경우 정 회장은 그동안 감춰온 큰 칼을 뽑아들 수도 있다. 지난 2005년 수시인사를 통해 정의선 사장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정 회장이 검찰과 법원의 족쇄에서 풀려나 다시 한 번 대숙청을 감행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일각에선 “이미 (감방에) 다녀온 사람이라 부담이 덜 할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검찰과 법원의 눈치를 엿보고 있기는 LG그룹 또한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구본무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계열사 서브원이 얼마 전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이 못내 부담스러울 것이다. 서브원은 곤지암리조트 개발사업을 맡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곤지암리조트 건설 승인 허가 관련 로비의혹 때문에 LG그룹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가 무혐의로 결론 난 바 있다. 서브원에 대한 최근의 검찰 조사와 관련해 ‘외환은행과 전산장비 납품 거래를 했던 LG-CNS에 관한 내용 때문일 것’이란 이야기가 나돈 바 있다. 검찰이 구 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는 계열사를 압박해 외환은행의 비자금 조성 문제에 대한 단초를 얻어내려 할 것으로 풀이된 것이다. 아직 별다른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상황이라 LG그룹과 구 회장 측이 검찰의 향후 행보를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법하다.
얼마 전 대규모 임원 인사를 단행한 LG그룹이 추가 인사를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검찰수사의 불똥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구 회장을 압박하게 될 경우 검찰이나 재판부 동향 파악과 적극 대처를 위한 조직개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LG카드의 악몽도 아직 구 회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오는 1월 19일 ‘LG카드 대주주 미공개 정보 이용 주식매각 사건’의 1심 선거공판이 열린다. ‘다행히’ 이 사건에 구 회장은 사건당사자가 아니지만 그의 여동생 남편인 최병민 대한펄프 회장과 LG그룹 오너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진 인물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매각 날짜 차이로 기소가 안된 구 회장 등 LG그룹 오너 일가 전체에 여론의 비난이 쏠릴 가능성이 크다.
4대 그룹 총수들 중 설날맞이 대사면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법한 인사는 바로 SK그룹 최태원 회장이다.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최 회장의 재판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사면 복권 소문이 나돌았다가 무산돼 아쉬움을 남긴 터라 이번 설 특사에 대한 기대가 클 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 노무현 대통령과 4대 재벌 총수들 간의 회동 자리 이후 ‘기업인 사면 논의’가 화제가 된 것을 감안해 최 회장이 이번 사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보는 인사들도 있다.
그러나 이번 특사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할 경우 최 회장이 내부 조직개편을 통해 분위기 쇄신을 꾀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면설에 묻혀 최 회장 사면설이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점을 최 회장이 어떻게 보고 있을지도 관심사다.
사면 복권이 안 된 기업인은 해외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청와대 회동에서 글로벌 경영의 중요성을 역설한 최 회장의 속내에 사면 복권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었을 것으로 보는 재계인사들이 적지 않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