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장관 취임 후 사사건건 대립, 체육회 정관개정 핵심 쟁점…배드민턴협회 감사 주도권 놓고도 힘겨루기
파리 올림픽에서 눈부신 성과를 낸 대한민국 선수단 본진이 8월 1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선수단을 비롯한 본부 임원진 50여 명은 해단식 겸 환영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해단식은 돌연 취소됐다. 취재에 따르면 선수단 입국 당일 ‘전장연 시위’ 등 변수로 해단식 개최 장소를 둘러싼 혼선이 빚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인천국제공항엔 유인촌 문체부 장관과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이 선수단 마중을 나왔다. 선수단이 입국장으로 나온 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보고문을 읽었다. 그리고 해단식 취소를 발표했다. 먼저 입국해 있던 메달리스트, 취재진 등은 해단식 예정 장소에서 기다리다 뒤늦게 취소 사실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체육계에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간 갈등을 나타내는 사례로 풀이했다.
2023년 10월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대한체육회와 문체부는 대립각을 세워왔다. 가장 큰 화두는 체육회 정관개정이었다. 체육회가 체육단체장 임기 제한을 없애는 정관 개정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문체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기흥 회장 3선 연임 정관’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개정안을 문체부가 비토한 형국이었다.
그 가운데 문체부가 대한체육회를 패싱하고 종목단체와 지자체 체육회에 예산을 직접 교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면서 갈등은 격화했다. 기존 시스템은 연 4200억 원 규모 예산을 문체부가 대한체육회에 넘겨주면, 이를 대한체육회가 종목단체 및 지자체 체육회에 예산을 교부하는 방식이었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문체부가 대한체육회와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면서 “대한체육회의 가장 강력한 권한인 예산교부권을 건드렸다는 건 대한체육회 힘을 약화하겠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체육계 안팎으로 힘자랑을 해왔고, 그 파워를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한번 꺾어보려는 치킨게임이 시작됐다는 말이 나온다”고 귀띔했다.
문체부가 국가대표 훈련비가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서 대한체육회 내부 불만이 증폭됐다는 전언도 나온다. 문체부는 지난 7월 ‘국가대표 훈련비 배분 적정성 검토 및 개선 연구’ 용역을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을 통해 발주한 바 있다.
KOC(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체육회를 통합운영할지 분리운영할지에 대한 의견도 갈린다. 대한체육회는 통합운영 기조를 유지하려 하고, 문체부는 분리운영을 추진하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KOC와 대한체육회 통합운영 여부는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IOC 위원직 유지 자격과 직결되는 사안이어서 민감도가 높다.
사사건건 부딪히던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촉발한 ‘메가톤급 논란’을 통해 다시 한번 주도권 싸움에 돌입한 양상이다.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의 폭탄발언 나비효과였다.
8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선 배드민턴 여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이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단식 결승에서 중국 허빙자오를 만나 세트스코어 2 대 0으로 승리했다. 안세영은 비로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타이틀을 획득하며 새로운 배드민턴 여제 탄생을 알렸다.
그러나 결승전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세영은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안세영은 “내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면서 “내 부상을 안일하게 생각한 대표팀에 많이 실망했다”고 했다. 안세영은 “이 순간을 끝으로 대표팀과는 계속 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안세영은 배드민턴협회 내부 관습, 대회 출전 강요, 안일한 부상관리, 훈련 지원, 스폰서십 계약 방식 등 민감한 주제와 관련해 작심 폭로했다. 안세영의 ‘금메달 레이스’ 결승점이 체육계 메가톤급 논란 출발점이 된 셈이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각자 진상조사 절차에 돌입했다. 대한배드민턴협회도 자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대한체육회는 8월 7일 안세영 발언과 관련한 조사위 구성 계획을 밝혔다.
문체부는 대한배드민턴협회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문체부는 안세영이 언급했던 미흡한 선수 부상 관리, 복식 위주 훈련, 대회출전 강요 등에 대한 경위를 파악할 예정이다. 국제대회 출전규정을 비롯한 제도적 문제점, 협회 보조금 집행 및 운영 실태까지 전분야에 걸쳐 협회를 감사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문체부 감사엔 스포츠윤리센터 조사관들이 합류한다.
앞서의 체육계 관계자는 “안세영 사건이 불거지면서 배드민턴협회가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갈등 격전지로 부상했다”면서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종목단체 중 배드민턴협회는 상당한 요충지로 거론될 만큼 존재감이 있다”고 했다. 배드민턴협회 감사 주도권을 놓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힘겨루기를 할 것으로 점치는 관점이다.
이 관계자는 “배드민턴협회는 엘리트 체육 성과를 적절히 낼 뿐 아니라 생활체육 인프라가 가장 강한 협회 중 하나”라면서 “조직망 역시 전국적으로 구성돼 있어 배드민턴협회의 곪은 부분을 짚어내는 순간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갈등이 더욱 심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곧 예정돼 있는데, 회장 선거는 대의원제이기 때문에 종목단체와 지자체 체육회에 대한 민심관리가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대한체육회와 문체부가 각자 조사 및 감사 절차에 착수한 건 ‘요충지’인 배드민턴협회를 둘러싼 진상조사 주도권을 둘러싼 속도전”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은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동시에 배드민턴협회 진상조사에 나선 상황과 관련해 “대한체육회 산하 종목단체들이 대부분 비슷한 사정일 것”이라면서 “연봉 상한제를 걸어놓고 스폰서십을 받아오면 협회가 연명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이 부분을 잘못 건드리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입장에선 연임이 힘들어지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면서 “대한체육회에서 진상조사를 한 뒤 문체부 감사 결과와 두 가지를 경합시키는 방식을 취하며 문체부 감사 결과를 무력화시킬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대한체육회가 활용했던 방식”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문체부 감사가 포인트를 제대로 짚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있다”면서 “안세영이 제기한 화두는 협회의 선진화에 관한 내용이고, 오래된 관습에 대한 철폐를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감사팀이 꾸려지면 ‘돈을 잘 썼네, 못 썼네’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스포츠윤리센터도 조사 및 감사 역량을 지금까지 증명해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대한체육회와 문체부 쪽 모두 진상조사를 한다고 하지만, 기대할 것이 있을지는 미지수”라면서 “이번 사건 핵심은 ‘스포츠종목단체 선진화 필요성’인데, 그 부분을 충족할 감사 및 조사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라고 덧붙였다.
체육계 일각에서 안세영 폭탄발언 관련 배드민턴협회 진상조사를 감사원이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풀이된다. 체육계와 무관한 제3의 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