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후지와라’ 인근에 미미나시산 터널이…‘구로베 댐’은 관련 자료 없어 대응조차 쉽지 않아
#미미나시산 터널과 가시하라 신궁
아스카는 일본 나라현 다카이치 일대의 지명이다. 이 이름을 따서 592~710년까지를 아스카 시대로 분류한다. 이 시기 백제 불상과 경전이 들어왔고, 불교가 공인됐다. 고구려와 백제 양식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신라에서는 조선술과 제방축조 기술이 들어왔고, 가야에서는 토기와 철제 무기 제작기술이 도입됐다. 여러 나라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서로 융합되며 일본만의 문화가 형성됐다.
아스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 정권의 실권자인 쇼토쿠 태자는 지방 호족이 왕에게 복종하는 내용의 헌법 17조를 제정하며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합한 수나라에는 사신단을 보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다음에도 인적 교류를 통해 당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처럼 아스카 시대는 처음으로 일본에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됐고, 기본적인 국가의 틀을 갖춘 시대로 평가받는다.
NHK 등 일본 언론은 9월 9일 일본 문화청 심의회와 세계문화유산부회가 아스카 시대에 만들어진 ‘아스카·후지와라의 궁도와 그 관련 자산군’을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아스카·후지와라 유네스코 등록추진협의회’는 “당시 중국·한반도 국가와 일본 사이에서 펼쳐진 정치·문화적 교류의 소산”이라며 “도래인(한반도 등 육지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을 적극적 수용한 데 따른 외래문화 도입과 일본 고유의 전통이 융합돼 독자적인 개화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에서 9월 말까지 잠정 추천서 제출 및 과제 대응 등 필요한 준비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잠정 추천서는 세계유산 등재를 희망하는 회원국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하는 세계유산 후보 목록이다. 정식 추천서는 2025년 2월 제출할 전망이다. 이후 유네스코 자문기관 사전 심사를 거쳐 빠르면 2026년 등재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NHK는 아스카·후지와라 자산군에는 덴무 천황 등의 궁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아스카 궁터, 선명하고 강렬한 색을 사용한 벽화가 발견된 다카마쓰즈카 고분, 가시하라시의 후지와라 궁터 등 22개 문화재가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이 문화재들이 모여있는 가시하라시에는 일제강제동원 사적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후지와라 궁터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미미나시산 터널이 있다.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장소다. 2008년 한겨레21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서 교사를 하던 다카노 미사키 등 ‘나라현 발굴모임’은 나라현 일대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를 조사했다. 이들은 미미나시산 터널에 조선인들이 강제징용 됐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제는 미군 등 연합군이 고대 유적이 많은 교토와 나라 지역을 함부로 폭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이 일대에 지하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미미나시산 터널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나라현 발굴모임은 미미나시산 터널 외에도 야나기모토 해군비행기지, 가시바시 쓰루미네의 항공군 지하지휘소, 고조시 기타우치의 연료저장용 지하시설, 우타노초의 야마토 수은광산, 노세가와무라의 가나야 광산 다테리 광업소 등이 발굴됐다.
후지와라 궁터 남서쪽으로 약 3.8km 떨어진 곳에는 가시하라 신궁이 있다. 1880년에 세워진 신사다.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다. 신사가 있는 곳은 진무 천황이 황위에 오른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다. 초대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일본 극우 단체들도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조선인들이 신사 참배를 강요받았던 장소다. 일제는 1931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제국의 대표적인 신사인 가시하라 신궁, 미에현에 있는 이세 신궁, 1920년 완공된 도쿄의 메이지 신궁 등에 조선인 신사 참배단을 동원했다. 일제 수뇌부는 진무 천황을 나라를 번영시키고, 제국주의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생각했다.
1938년 6월 일제는 가시하라 신궁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궁 확장 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미나미 조선 총독은 청년대표단을 결성해 파견했다. 이들은 신궁 확장 사업에 동원됐다. 1938년 6월 10일 동아일보 1면에는 ‘반도청년 대표 20명’ ‘3000 청년 대중 참렬(參列, 대열이나 행렬에 참여함)’ 등의 문구가 나온다. 정확한 동원 인력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때와 유사한 방식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사도광산 등재 때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7년)로 한정했다. 조선인 강제동원 시기(1939~1945년)를 뺐다. 이번에도 강제동원 시기만 제외하고 세계유산으로 올리려는 방법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가시하라 신궁은 초대 천황을 모시는 신사인 만큼 세계유산 등재목록에 올라갈 확률이 높다.
다만 유네스코는 사적지의 전체 역사를 설명하라고 권고했다. 일본은 사도광산 갱도에서 2km 떨어진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2층 D전시실 1구획에 별도 전시 시설을 마련했다. 이곳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내용이 적힌 패널을 설치했다. 패널에는 ‘강제’라는 문구는 나와 있지 않다. 이곳은 에도 막부 시기 관공서였고, 나중에는 전범기업 미쓰비시 사도섬 사무소가 됐다. 강제동원 사적지인 셈이다. 사도섬 번화가에 있는 이곳은 사도광산과 연계된 관광코스가 됐다. 이처럼 강제동원 사적지를 등재목록에 올리지 않고, 세계유산과 연계된 관광 코스로 활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강제동원 입증 자료 없는 구로베 댐
미미나시산 터널과 가시하라 신궁의 경우 한국 정부가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신문기사 등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물이 있고, 나라현 발굴모임처럼 이 문제를 추적한 일본 시민단체도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다음 등재가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구로베 댐이다. 구로베 댐 건설 때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그러나 구로베 댐 관련 학술 자료나 구술기록 등은 없다. 강제동원 구술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에도 관련 기록이나 자료는 없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홈페이지에 있는 ‘지도로 보는 강제동원’에도 구로베강 지역은 나와 있지 않다.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고노가와 준코, 호리에 세쓰코, 우치다 스에노 등이 1992년 펴낸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는 구로베강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추적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 책에 따르면 1883년 일본은 전기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전기 수요가 늘면서 생산비가 낮은 수력발전이 주목받았다. 1912년부터는 수력발전이 화력발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정부는 1910년 제1차 수력 조사를 실시했고, 전기사업법을 제정해 수력발전 육성에 나섰다.
일본 전기회사들은 구로베강을 두고 사업권 쟁탈전을 벌였다. 20개 이상의 회사가 사업권을 따내려고 경쟁했다는 기록이 있다. 승자는 동양알루미늄 주식회사다. 그러나 투자금을 받지 못한 동양알루미늄은 1922년 일본전력 주식회사에 주식을 양도했다.
일본전력은 4개 발전소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구로베 제1발전소는 1928년 건설됐다. 제2발전소는 세계 공황의 여파와 자연경관 보호 운동에 직면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으로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경기가 회복됐고, 전력 수요가 증가하면서 제2발전소 건설이 결정됐다. 제3발전소는 1936년 9월 군사력 증강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건설됐다.
발전소 공사장에는 다수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에는 오랜 기간 조선인 노동자가 유입됐다. 1910~1918년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조선 농민 77%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거나 소작농과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이동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7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일본으로 건너왔다. 1931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강제동원했다.
구로베 제3발전소가 완공된 1940년 우치야마 인구는 4830명이었다. 인근 공사장에 배치된 인부는 우치야마 인구와 맞먹는 3500명이었고, 이 중 3분의 1이 조선인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문 기사 등 기록에는 ‘발전 공사장에 조선인 과잉, 언제 뜻밖의 사고 발생할지 경계’ ‘조선인 노동자가 없었으면 구로3(구로베 제3발전소) 댐은 완성하지 못했을 것’ 등의 문구가 나온다.
책에는 한 장의 사진이 나온다. 사진에는 이곳에서 징용공으로 일했던 김종욱 씨가 구로베 제3발전소 인근에 있는 시아이다니 지역에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김 씨는 시아이다니에서 함바집 감독으로 일했다. 함바집은 일제강점기 토목 공사나 광산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간이 건물을 말한다. 김 씨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한 살배기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1938년 12월 27일 새벽에 발생한 눈사태는 김 씨를 제외한 가족 모두를 덮쳤다. 100여 명이 생활하고 있었던 숙소 일부도 무너뜨렸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시신조차 찾기 어려웠다.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얼어붙은 눈을 파헤쳐야 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시신은 1939년 눈 속에서 발견됐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47년 뒤 김 씨는 이곳을 찾아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을 장소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3년 뒤 서울에서 운명했다.
책에는 저자와 김 씨가 주고받은 편지가 나온다. 구로베 발전소 건설 현장에 강제동원 여부를 묻는 말에 김 씨는 “강제징용이라든지 강제 노동은 아니었다”면서도 “도항증명서를 받을 수 없는 희망자가 모집인한테 속아 일본에 와서 감방 같은 곳에 들어가 완전히 자유를 잃고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노예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일제는 강제동원을 할 때 ‘너는 징용을 피하는 것’이라고 노동자에게 이야기한다. 전쟁터나 가혹한 공사현장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자신은 행운아라고 여기도록 세뇌했다는 것이다. 인천 부평 조병창에 동원된 노동자도 대부분 자신이 강제징용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 씨처럼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일본에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로베 댐 건설에 참여한 건설사들은 하청에 재하청 계약을 맺고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조선인 ‘십장’과 십장을 따라다니는 노동자가 있었다. 조선인 십장과 계약하기 때문에 일제에 강제동원 됐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정 대표는 “일단 본인이 강제동원 됐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런 구조가 있다 보니 사람들이 스스로 (강제동원 된 게) 아닌가 보다. 스스로 돈 벌러 갔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정부에 신고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며 “피해자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피해자를 찾으려면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어서 신고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현재 피해자 신고를 받을 전담 기관은 없다. 이 문제를 전담했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 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2015년 활동이 종료됐다. 위원회 기능은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국가유산청 등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강제동원 관련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피해 사례를 수집하는 기관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관련기사 [단독] 휘갈긴 ‘철거예정’만 을씨년스럽게…일제 강제동원 국내 유적지 방치 실태).
사도광산 논란 이후 정치권에서는 강제동원 문제를 전담할 위원회를 다시 만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취재결과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일항쟁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강제동원 문제를 전담할 위원회를 다시 만드는 게 핵심 내용이다. 한정애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법 초안이 나왔고, 추석 이후 발의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