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발언 한동훈 선공에 일일이 받아친 이재명…채 해병 특검법 등 구체적 합의 도출 없이 입장차 확인
#11년 만의 여야 대표 회담
8월 30일 박정하 국민의힘 대표 비서실장과 이해식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은 국회 브리핑에서 여야가 합의한 회담 의제를 발표했다. 회의 의제는 총 6개로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각각 3개씩 정했다. 국민의힘은 정쟁중단, 민생회복, 정치개혁을 논의하자고 했다. 민주당은 지구당 부활, 채 상병 특검법, 25만 원 지원법을 회의 테이블에 올리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이 요구한 의정 갈등 및 의료 공백 사태는 정식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9월 1일 오후 1시 56분.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진성준 정책위의장, 조승래 수석대변인, 이해식 당대표 비서실장, 권혁기 당대표 정무기획실장 등이 입장했다. 뒤이어 한동훈 대표를 비롯해 김상훈 정책위의장, 곽규택 수석대변인, 송영훈 대변인 등이 들어왔다. 양당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했다.
이재명 대표는 한 대표에게 먼저 발언하라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표는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나갔다. 그는 “제가 ‘격차해소’를 말하고, 이 대표님께서 ‘성장’을 말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전통적인 지점을 확장해 상대를 향해 움직이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며 “11년 만에 열린 여야 대표 회담이 이견을 좁히고 공감대를 넓히는 생산적 정치, 실용적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주거격차, 자산격차, 돌봄격차, 교육격차 등 격차 해소 △자본시장 밸류업을 위한 금투세 폐지 △육아휴직 기간과 연령 확대, 배우자 출산휴가 급여지원 확대, 임신기 근로 시간 단축 기간 확대 법안 도입 및 인구전략기획부 신설 △촉법소년 연령 하향, AI 기본법, 반도체 특별법 등 법안 도입 추진 △저렴하게 전력을 공급할 공급망 구축, 원자력산업 육성, 신재생 에너지 개발 등 에너지원 다변화, 여야의 ‘에너지공동선언’ 발표 △면책특권 범위 제한, 재판 기간에 세비 반납, 정쟁 해소 등을 제안했다.
한 대표는 “이 대표님과 저의 공통점은 중앙정치, 소위 ‘여의도 정치’에 오래 물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라며 “두 사람은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회담에서 ‘정쟁의 중단’을 대국적으로 선언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정치개혁’ 비전에 대해 합의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는 자극적인 정쟁 현수막을 순화하고 자제하고, 비정쟁법안을 따로 처리하는 ‘민생 패스트트랙’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화기애애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대표가 민주당의 ‘법안 강행 처리’ 기조를 꼬집으면서다. 한 대표는 “‘법안 강행 처리는 거부권, 재표결, 폐기, 그리고 재발의’라는 도돌이표식 정쟁 정치가 개미지옥처럼 무한 반복되고 있다. 국회의 탄핵소추권 남용과 처분적 입법의 남발이 헌법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며 “하는 우리도, 보는 국민들께서도 모두 피곤하지 않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 대표 사법리스크를 언급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이 대표님과 민주당에 대한 수사나 기소에 관여한 검사들을 상대로 시리즈처럼 해온 민주당의 탄핵은, 곧 예정된 판결 결과에 불복하기 위한 빌드업으로 보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며 “재판에 주류 정치세력이 불복하면, 민주주의의 위기, 법치주의의 위기가 오고, 국민 모두가 피해를 본다. 곧 나올 재판 결과들에 대해 국민의힘은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선 넘는 발언이나 공격을 자제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 대표는 “민주당도 재판 불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대표가) 무죄를 확신하고 계시는 듯하니 더욱 그렇다”고 덧붙였다.
선수를 양보한 이 대표는 한 대표 발언 일부를 메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의료대란, 고물가·고금리, 실질소득 감소, 경기 침체, 사상 최대로 나타난 임금체불,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자영업자 줄폐업 등 정부·여당의 ‘아킬레스건’을 열거하며 발언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존중하지 않으면서 존중하는 척하고, 상대에게서 무언가 뺏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다”며 “남들이 보는 공간에서의 대화도 필요하지만 실제로 내 속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필요해서 굳이 생중계 재고를 요청했는데 존경하는 한동훈 대표께서 수용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한 대표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의료대란에 대해서는 “의료대란을 공식의제에서 빼자고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안타깝다”며 “한 대표께서도 정부와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안을 내시는 것처럼 의료대란 문제는 국민 생명에 관한 문제다. 이것은 손바닥으로 가리고 또 안 보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필수공공의료, 지역의료를 강화해야한다는 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집단끼리 충분한 대화와 대화를 통한 양해와 타협이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힘으로 밀어붙여서 굴복을 강요하게 되면 성공해도 후유증과 피해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서는 “(한 대표는) 제3자 추천 특검으로 한다고 말씀하셨다. 조건을 하나 더 붙이셨는데, 증거조작도 특검하자고 했다. 저희가 수용하겠다”며 “이제 결단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소소한 조건들을 추가한다면 그 역시도 적극 검토하겠다는 말씀 드린다”고 밝혔다.
또 이 대표는 “최근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할 수 있는 과도한 조치가 좀 많아지는 것 같다”며 “이런 것들이 결코 실정이나 정치 실패를 덮지는 못한다”고 언급했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검찰 조사를 비판한 대목으로 풀이된다.
이 밖에도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에 대한 타협안 도출 △독도문제, 교과서문제, 일제침략관련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제한 법안 협조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와 더불어 대통령 소추권 논의 추진 △계엄령 우려 해소 필요성 지적 △지구당 부활 우선 추진 △쌀값·한우 값 안정 및 식량주권 보호 대책 마련 △RE100과 탄소 국경세에 대한 대비와 재생에너지 기반확충에 대한 합의 도출 △인공지능과 반도체 등 미래과학기술진흥책 마련 △금투세 등 주식시장 정상화 정책 추진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러라고 63%가 저를 지지했다’는 한 대표의 발언을 인용하며 “정치는 국민 뜻에 따르는 것이 대의”라며 “국민들의 선택의 무게를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말씀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모두발언에서는 한 대표가 약 12분 동안 발언했고, 이 대표가 약 18분을 썼다. 현장에 있던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합의된 시간은 약 10분 내외였는데, 이 대표가 현장에서 더 길게 발언했다고 전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한 대표가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을 할 것을 예상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 대표가 키워드 중심으로 원고를 썼고, 이 외에는 즉석에서 한 발언이라고 귀띔했다.
#입장차만 확인
회담은 당초 예상보다 오래 진행됐다. 오후 5시 2분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회담 장소를 떠났다. 양당 수석대변인들에 따르면 언성이 높아지거나 얼굴을 붉히는 것 없이 차분한 대화가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곽규택 국민의힘과 수석대변인과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합의된 내용을 발표했다. 양당은 △민생 공통 공약 추진을 위한 협의기구 운영 △금투세 및 주식시장 구조적 문제 개혁 등 주식시장 활성화 방안 종합 검토 △추석 연휴 응급의료체계 구축 노력 △가계 및 소상공인 부채 부담 완화를 위한 지원 방안 적극 강구 △저출생 대책으로 부부 육아휴직 기간 연장 등을 위한 입법 과제 신속 추진 △딥페이크 성범죄 관련 처벌과 제재 등에 대한 제도적 보완 신속 추진 △정당정치 활성화를 위한 지구당 도입 적극 협의 등의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서는 입장차만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곽규택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에서 일방적으로 설정하는 기한에 맞춰 당의 입장을 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의료대란에 대해서 이 대표는 대통령의 사과,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책임자에 대한 문책, 대책기구 구성 등을 요청했지만 구체적인 합의는 불발됐다. 2025학년도 의대증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의는 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관련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이 대표가) 전 정권 수사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국민 보시기에 어떨 것이며 현재 대통령과 집권세력 측면에서도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이야기했다. 한 대표는 딱히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금투세 등 자본시장 개혁과 전 국민 25만 원 지원금에 대해서도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이 대표는 자본 시장 비정상적 양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조치가 함께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함께 논의하자고 답했다. 25만 원 지원금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말했지만, 한 대표는 현금성 살포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구당 부활은 합의가 진전됐다. 다만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이견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고, 당내 협의 과정이 필요하다. 여러 걱정도 있다. 과거 돈 먹는 하마라 불렸다. 지금은 정치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기우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 잘 분석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하자는 게 합의”라고 말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