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놀이·장난으로 시작해 범죄라는 인식 낮아…“가해자 감형 등 솜방망이 처벌 문제”
A 씨는 “이름, 나이, 거주지, 신체 사이즈, ‘남자만 보면 질질 OO’는 등의 성희롱적 발언과 ‘좋아요’ 몇 백 개 이상 달성 시 SNS 주소를 뿌리겠다는 예고까지 있었다”며 “그 링크 안에는 수천 명의 피해자가 있었다. 딥페이크를 통해 정액과 본인의 얼굴이 합성되거나, 나체와 본인 얼굴이 합성된 사진이 업로드 돼 있었고 미성년 피해자들 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지난 5일 열린 ‘딥페이크 성폭력 박멸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증언했다.
전 세계가 딥페이크(딥러닝 기술을 사용한 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 불법합성물 성범죄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연령, 직업 등을 불문하고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미국의 사이버보안 업체인 ‘시큐리티 히어로’가 최근 발표한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등장하는 개인 중 53%가 한국인인 것으로 나타나 우리나라의 딥페이크 범죄가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서울대 N번방’ 사건과 인하대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에 이어 초중고생 딥페이크 피해 학교 리스트까지 공개되면서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교육부는 9일 17개 시도교육청을 통해 파악한 결과 올해 1월부터 지난 6일까지 학생‧교원 딥페이크 피해 건수가 총 434건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딥페이크 피해자는 총 617명으로 학생이 588명, 교사 27명, 직원 등 2명으로 집계됐다. 가해자 중 10대의 비율도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딥페이크 성범죄 가해자 중 10대가 75%로 가장 많았다.
군 당국도 비상이다. 최근 여군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음란물 영상을 제작·유포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여군을 ‘군수품’으로 지칭하며 여군의 군복 사진, 계급, 나이, 인스타그램 계정 등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방부에 따르면 군 내 딥페이크 피해자는 현재 24명으로 확인됐다.
텔레그램 N번방을 취재한 디지털 성범죄 심층 취재 단체인 ‘추적단 불꽃’의 전 활동가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5일 열린 ‘딥페이크 성폭력 박멸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전국에 있는 초·중·고·대학교, 일터, 집에서 친구, 동료, 가족을 대상으로도 딥페이크 성범죄가 벌어지고 있다. 가해자의 수를 명확히 가늠할 수조차 없다. 텔레그램과 X(옛 트위터), 디스코드 등 수많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범죄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가족과 지인에 대한 배신감, 사회에 대한 불신, 하물며 경찰에게 찾아가도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 피해자의 일상에 붕괴를 가져오는 범죄”라고 딥페이크 불법 영상물 범죄를 규정했다.
무심코 SNS에 올린 사진이나 졸업사진 등이 딥페이크 불법 영상물 범죄에 악용되기 때문에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도 일상 공간 어디서든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공포를 일으키고 있다. 한번 유포되면 추적 및 확산 억제가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이소은 국립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5일 국회 과학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연 ‘딥페이크 성범죄영상물 근절’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이미지 조작 및 합성이 다양한 어플리케이션과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등을 통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됐고, 아동·청소년도 손쉽게 접근이 가능해졌다”며 “청소년들 사이에서 딥페이크 범죄가 확산한 것은 딥페이크를 놀이와 장난, 호기심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데다 피해자와 직접적 접촉이 없어서 위해를 가하는 범죄란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하고, 또 피해 사실을 인지했더라도 텔레그램, X 등 해외 소셜미디어를 통해 범죄가 일어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가해자 특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민고은 법률사무소 진서 대표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고 피해자에게 직접적 가해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가) 범죄 증거를 갖고 있기 쉽지 않다”며 “온라인상에 허위 영상이 유포됐을 때 유포자는 누구고, 제작자는 누구인지를 피해자가 직접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주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등 해외 SNS가 딥페이크 불법영상물 유포에 악용되면서 딥페이크 범죄가 급속도로 확산했다는 비판도 크다. 해외 SNS는 국내 회사와 달리 국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이 해외 사업자에게는 강제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불응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
어렵게 가해자가 특정돼 경찰에 붙잡혔다 해도 처벌 수위가 낮다는 점도 지적 대상이다. 김남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2020년 딥페이크 성착취물 처벌 강화법 시행 이후 대법원 판결문을 입수해 전수 분석한 결과 기소된 87명 중 34명(40%)이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24명(27.5%)뿐이었고, 벌금형은 14명(16%)이었다. 선고유예와 무죄도 각각 2명(2.2%) 있었다.
김남희 의원은 “범죄 행위가 상당한데도 가해자들은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감형받는 게 현실”이라며 “딥페이크 영상물에 대해 제작과 유포 행위만 처벌할 것이 아니라 영상을 소지하고 시청하는 사람까지 모두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