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전 국정원 대구지부장 ‘우리가 몰랐던 간첩 잡는 이야기’ 집필…“국민 안보 불감증 심각”
지난 수십년 동안 국정원이 처리한 간첩 사건 내막은 ‘수사보안’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비밀에 붙여왔다. 조직 불문율을 깨고 책을 출간한 하 전 지부장은 “2023년 민노총·창원·제주간첩단 조직이 국정원에 의해 적발됐고, 뉴스로도 보도됐지만 사람들은 아예 믿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만큼 국민 안보불감증이 심각하다. 간첩활동은 간첩도 알고 북한도 알고 국정원도 알지만, 국민들만 모른다”고 말했다. 하 전 지부장에게 '우리가 몰랐던 간첩 잡는 이야기'를 집필한 배경과 어떤 심정을 담았는지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신분노출로 인한 위험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책을 출간한 이유가 있나.
“솔직히 내 신분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지난 30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녹을 받은 사람이다. 비록 은퇴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반드시 증언을 해야 하는 것이 한때 공직자로서 당연한 의무라 생각했다. 공무원 1급이 국회 입법을 어떻게 막겠느냐마는 지난 정부 시절 국정원 수사권 폐지가 입법화되는 과정에서 1급으로 재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존재 앞에 죄스러운 심정이고 개인적으로는 외풍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선배로서 국정원 후배들에게 너무나 미안할 따름이다. 이제는 만시지탄이지만, 지난 과정을 냉철하게 복기하고 반성하며 정치권의 또 다른 '국가안보 자해행위'가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경험한 사실들을 국민들께 정확히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썼다. 간첩수사권은 반드시 국정원이 다시 수사할 수 있도록 복원시켜야 한다고 본다.”
—국정원장 회고록 정도를 제외하면, 국정원 전·현직 수사관 중 최초로 책을 냈다.
“그 동안 은퇴한 전직 실무관 또는 국정원 실상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조직을 소재로 책자를 발간해 개인 견해를 담은 학술 논문식 책자를 출간하긴 했다. 그와 달리 은퇴한 고위직이 간첩수사 30년 직접 경험을 생생하게 표현해 책으로 출간한 것은 1961년 국정원이 창설된 이래 최초 사례다. 풍부한 간첩수사 전문식견과 주요 사건 숨은 에피소드, 간첩수사권 폐지 이후 대안 제시 등은 어떤 도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책 출간 후 곧 1쇄가 모두 완판될 정도로 독자들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나도 놀랐다. 일단 간첩사건 설명에 검찰 수사결과 자료까지 첨부해 진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은 어떤 내용인가.
“한마디로 국정원판 ‘먼나라 이웃나라’라고 보면 된다. 간첩 위험성, 북한 대남공작 실태 등과 같은 무겁고 딱딱한 주제를 쉬운 설명과 함께 재미있는 만화 삽화까지 곁들였다. 구성은 성경을 벤치마킹했다. 구약·신약은 모두 소제목과 함께 그에 맞는 본문 내용이 있어 매우 가독성이 높다. 또한 내용도 변화를 주려고 했다. 우리는 유년시절 국가안보를 주제로 안보교육을 받을 때 항상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강감찬 장군,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6·25의 교훈 등을 소재로 주입식 학습을 받아왔다. 이것이 틀린 방식은 아니지만 매우 반복적이고 관행적이라 국민들 마음에 제대로 와 닿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중요한 가치도 똑같은 반복교육을 받다 보니 국민들은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면서 국가안보를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주제로 인식하게 된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 책은 국가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국정원 요원들의 애환과 지난 5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국가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간첩사건들의 숨은 뒷얘기, 국정원 수사권 폐지의 부당성, 선진국들의 국가방어 시스템들 사례 등을 최대한 흥미롭게 기술했다.”
—책을 집필하면서 겪었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책 본문에는 수많은 간첩사건 관련자들이 등장하는데 예민한 사안이라 모두 가명 처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주사파의 대부 ‘강철서신’ 김영환 씨만큼은 실명을 공개하고 싶었다. 그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도 컸고, 비록 사상적인 궤적은 달랐지만 나는 김영환 씨를 진정한 사상가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과거 김영환씨는 김일성을 두 차례나 직접 만났고, 이후 반국가단체 민혁당을 결성했을 정도의 거물급 주사파였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허상과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며 과감하게 전향하여 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그 점을 높이 산다. 올해 초 해외 출장중인 김영환 씨에게 연락했다. 책 초안을 읽어본 그는 흔쾌히 국제전화로 자신의 실명을 쓰는 것을 허락한다며 답신이 왔다. 이 지면을 빌어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한때 주사파 대부로부터도 인정받았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책 부제가 ‘사라진 국정원 수사권, 살아갈 우리의 생존권’ 이다. 부제를 지은 배경은.
“국정원 간첩수사권 폐지로 인해 국가안보 공백이 이제 불가피하다. 예전에는 국민들이 간첩 존재나 해악성에 대해 믿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왜냐하면 국정원이 꿋꿋하게 간첩조직을 적발해 척결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수사 보안이라는 이유로 간첩을 잡는 과정이나 내막을 공개하거나 홍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국민들이 ‘아직도 간첩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상황이 됐다. 안보불감증이 일상화된 건 국정원 판단 미스 때문이다. 특히 올해부터 국정원 수사권이 폐지되고 모든 간첩수사를 경찰이 전담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간첩수사 기능이 무력화된 셈이다. 그동안 국보법 위반 수사는 국정원과 경찰이 이원화 처리해 왔는데 경찰은 국가보안법 7조 위반 국내사범만 처리했고, 국정원은 북한과 직접 연계된 지하간첩단 조직을 처리해 왔다. 해외내사와 간첩통신 분석 과학수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찰은 해외에서 북한 상부선 간첩과 접선하는 국내 간첩단 조직을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당연히 수사권 없는 국정원도 불법을 감수하면서까지 미행감시 활동을 하지 않는다.”
—최근 ‘블랙요원 신상유출 사건’에서도 국정원 대공수사권이 사라지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최근 ‘블랙요원 신상유출 사건’에서도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재로 인한 한계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정보사 군무원이 저질렀는데, 과거라면 국정원이 수사를 주도하고 배후까지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국정원이 이상 징후를 감지해도 방첩사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방첩사는 국정원만큼 전문적인 간첩수사 능력이 없어 군무원 조사가 미흡했다. 그런데도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해 ‘국정원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과 1차장을 지낸 박지원, 박선원 의원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수사권이 없다 보니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방첩사에 블랙요원 유출 정황을 통보할 수밖에 없는 국정원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건지 황당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 정치인은 ‘요즘도 간첩이 있나요?’ 라고 반문한다. 30년 동안 간첩만 잡아온 사람으로서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현재 간첩이 대한민국에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간첩세력이 뿌리박혀 있지만 국민들이 간첩 존재와 해악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안보 불감증이 큰 문제다. 2023년 5월 민노총 간첩단 수사를 끝으로 국정원 간첩 수사권은 폐지 됐다. 북한으로부터 지령문을 받고 간첩 활동을 벌인 전직 민주노총 간부 4명이 구속된 사건이었다. 간첩들은 후쿠시마 원전수 괴담 확산, 이태원 참사 계기 정권 퇴진시위 지령을 받았다. 국민들은 간첩단 적발 뉴스를 접해도 이제는 무덤덤하다. 간첩 존재를 아예 믿지 않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민노총, 창원, 제주 간첩단 등 사건들이 적발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이를 기억하는 국민들은 10%도 안 된다. 검찰이 간첩사범을 기소할 때 상세한 수사결과를 공개해도 국민들은 흘려 버린다. 국가안보 침해는 가시적인 피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첩 활동은 결정적 순간에 국가를 파멸로 이끌 수 있어 위험하다. 국정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수십년 동안 수사보안이란 이유로 간첩사건들을 숨겨온 게 능사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국민들이 간첩 존재 자체를 망각한 듯하다.”
—간첩 사범 기소 언론 보도에서 북한이 간첩에게 구체적 구호까지 지정해 지령으로 내려보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간첩이 많다고 생각하나.
“간첩의 정의는 북한과 내통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간첩이 많지는 않다. 북한과 내통해 지령을 받는 건 소수다. 예를 들어 국민들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충분히 정부에 분노를 표할 수 있다. 다만 그걸 확산시키고 이용하는 극소수가 있을 뿐이다. 무턱대고 정부를 비판한다고 간첩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간첩을 잡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은 보통 얼마나 걸리나.
“일반적으로 한 사건이 7년 정도 걸린다.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된 사건은 12년 정도였다. 간첩이 중국, 동남아 등에서 북한과 접선하는 게 1년에 1~2번 정도다. 보안을 지키며 국외로 출국하기에 포착을 장담할 수 없다. 증거를 쌓고 배후 조직과 규모를 파악해 기소할 정도가 되려면 7년 정도가 걸린다.
—간첩에 대해 우리가 방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주체사상을 믿는 사람이 있느냐’는 게 클 것 같다.
“간첩이 잡히면 언론에서 ‘시대착오적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 등으로 묘사한다. 이는 잘못됐다. 최근엔 북한이 제공하는 공작금이 가장 큰 유인 요인이다. 공작금 규모가 어마어마하며, 가상자산, 차명 계좌 등으로 흩뿌려 찾기 힘들다. 국정원이 ‘공작금 10억 원 찾았다’는 보도 뒤에는 파악 안 된 돈이 훨씬 많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은 간첩 공작금으로 은마 아파트 10채를 살 정도 돈을 내려줬다. 최근엔 북한 직파간첩들이 국내 자생간첩들을 연 2~3회 만나 활동 보고를 받고 지령과 공작금을 전달한다. 전적으로 돈 때문에 간첩 역할을 덥석 맡긴 어렵지만, ‘주체사상에 대한 나쁘지 않은 감정’이 있다면, 북한 제안을 더 쉽게 수락할 수 있게 된다. 중요도는 돈이 가장 크다.”
—지금 대한민국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보는가.
“국가체제가 무너지는 방식은 외부의 적 또는 내부의 적에 의해서다. 외부의 적 북한은 군이, 내부의 적 간첩세력은 국정원이 막아왔다. 군과 국정원은 안보를 지켜온 든든한 쌍벽이었다. 올해부터 국정원 간첩수사권이 폐지됐다. 군이 외부의 적을 방어해도 내부의 적이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내부갈등이 최고조다. 국회는 민생을 팽개친 채 여야 간 분노와 증오만 쏟아낸다. 정치권이 국가안보까지 정쟁 소재로 삼아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시켰다. 국가 존립에서 매우 심각하다. 대한민국을 방어해 온 두 축 중 하나를 무너뜨렸다. 이는 북한이 환호할 일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문재인 정부 대공수사권 폐지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공안수사 경험이 없는데도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대공 분야를 ‘수사보다 정보의 영역’이라고 본 것도 정확하다. 다만 국민의힘에 큰 기대는 없다. 지금 상황에서 국정원이 노하우를 경찰에 이식해도 5년 내 간첩단 검거는 힘들 것이다. 간첩 수사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최근 경찰이 간첩 수사가 어렵다고 해, 내가 강연을 2번 나갔다. 당장 몇 차례 강연으로 노하우를 전수하기는 불가능하다 해도 최소한 어떤 점이 어려운지는 알려주고 싶어서 강연에 응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국민의힘이 대공수사권 회복을 주장하고 있으나, 국회에서 실현되긴 힘들 것이다. 만약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이 대공수사권 박탈과 관련해 간담회를 개최한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어떤 모욕을 당한다고 해도 꼭 현장의 얘기를 전달하고 싶다. 현재는 이 상황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책을 집필했다. 앞으로 강연과 언론 인터뷰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