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 라인’ 청산 압박에 불쾌감, 국정 전환용 인적 쇄신엔 공감…윤-한 독대 분수령 전망
#용산도 아는 인적 쇄신 효과
역대 정부 대다수가 그러했지만 윤석열 대통령도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인적 쇄신을 통해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가장 최근 사례를 보면 지난 4·10 총선 패배 직후인 4월 22일, 윤 대통령은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을 대통령실 비서실장에, 홍철호 전 의원을 정무수석에 임명했다.
여소야대 국면을 또다시 만들어낸 총선 참패라는 정치적 위기에서 윤 대통령은 정 비서실장을 비롯해 정치인 출신들을 핵심 참모로 기용했다. 기자 출신인 정 실장은 정치 현장에 대한 경험이 많아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 인사가 발표된 직후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출신이라 명령하려고 하는데 정진석 의원은 바른 말을 하시는 분이니 (정 의원에게) 함부로 못 할 것 아닌가”라고 호평했다.
윤 대통령은 정책적 위기를 맞았을 때도 인사로 돌파구를 찾았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를 둘러싸고 여론이 악화하자 윤 대통령은 칼을 빼들었다. 윤 대통령은 2023년 12월 28일 비서실장과 정책실장, 국가안보실장 등 대통령실 최고위급 참모를 한꺼번에 교체했다.
김대기 비서실장이 이관섭 정책실장으로 교체됐고 공석이 된 정책실장에는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를, 공석이던 안보실장에는 장호진 외교부 1차관을 각각 발탁했다. 윤 대통령은 2022년 5월 취임 이후 약 20개월 만에 처음 비서실장을 교체하는 동시에 대통령실 ‘3실장’을 모두 바꿨다.
김대기 비서실장의 경우 윤 대통령 신임이 두터워 장기근속이 점쳐졌다. 하지만 윤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30%대에서 계속 정체된 가운데 엑스포 유치 실패에다 총선까지 다가오자 여권을 중심으로 대통령실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윤 대통령은 이를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쇄신 인사 요구를 받아들였다.
보수의 원로로 불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10월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명태균 사건’과 관련해 굉장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한 뒤 “대통령실 개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참모들의 역할이 없다. 이렇게 가면 수습이 안 된다”면서 “윤 대통령이 용산을 개편하면서 경험이 많고 사심이 없고 균형이 있는 사람들을 삼고초려해서라도 데려와 청와대 보좌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그리고는 (데려온)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그대로 하면 어느 정도는 수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박근혜도 인사로 돌파
임기 5년의 단임 대통령제 하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큰 고비를 맞곤 했다. 보수정부로 범위를 좁혀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3년 차인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이 참패하며 위기를 맞았다. 당 안팎에서 국정쇄신론이 거세게 제기됐다.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은 이 전 대통령은 7월 13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실장과 정책실장 등을 교체했다. 8월 8일에는 국무총리와 장관급 9명을 교체하는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선거 패배 직후 어물쩍 넘어가려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한 달여가 지나 인적 쇄신을 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3년 차를 맞은 2015년 정초부터 인적 쇄신 카드를 빼들었다. 그해 1월 23일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킬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새 총리 후보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전격 내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신년 기자회견과 연초 국무회의에서 총리 교체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채 공석인 해양수산부 장관 등 “꼭 필요한 부처에 한해 소폭 개각을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커져만 가는 위기상황 속에서 총리 교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여러 악재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관련 제도를 손질하면서 연말정산 세금 폭탄이 터졌다. 이보다 앞서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파문이 터졌고, 청와대 민정수석 항명사태까지 일어나면서 박근혜 정부는 집권 3년 차 징크스의 덫으로 빠져들고 있던 터였다.
민심 이반의 경고음이 울리자 박 전 대통령은 총리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지율 하락에 속앓이를 하듯, 박 전 대통령 역시 국정수행 지지율이 속절없이 추락하면서 국정운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30%를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TK(대구·경북)와 50대마저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는 경고음까지 나왔다.
이러한 것들이 총리 교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고 임기가 4개월이나 남은 여당 원내대표 이완구를 내각으로 조기에 호출했다. 박 전 대통령이 그만큼 다급했다는 것으로 읽혔다.
친박으로 분류됐던 전직 국민의힘 의원은 “정치적 위기가 닥치면 인사를 통해 메신저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메시지에 대한 기대감을 안길 수 있다”며 “그렇지만 박 전 대통령 당시 이완구 총리는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몇 달도 안 돼 낙마하고 말았다. 위기에 떠밀려 하는 급한 인사는 또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한 독대, 김건희 매듭 풀까
10·16 재보궐 선거에서 만족스런 성적표를 받아든 한동훈 대표는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인 10월 1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용산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김건희 여사의 대외활동 자제 △김 여사 관련 대통령실 인적 쇄신 △김 여사 의혹 규명 적극 협조 등 요구를 공개적으로 쏟아냈다.
한 대표는 전날 재보궐 선거 승리의 공을 자신에게 가져오면서 대통령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안을 작심하고 다시 거론했다. 그동안 기자들과 질의응답 형식을 빌려 던지기 식으로 말했던 것과 달리 이날은 공식 회의석상이었다는 점에서 모든 언론이 한 대표 발언에 주목했다.
대놓고 거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실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관련, 김 여사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린 당일 한 대표가 “의혹 규명을 위해 필요한 절차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을 놓고는 불쾌감이 역력하다.
대통령실은 한 대표 요구에 떠밀려 급하게 인적 쇄신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방침이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여사 라인’ 청산 요구에 대해 대통령실은 “대통령실의 라인은 오직 대통령 라인만 있을 뿐”이라며 ‘여사 라인’ 존재 자체를 강하게 부인해왔다. 한 대표 요구 후 대통령실이 대규모 인사를 한다면, 자칫 비선 의혹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우선 김건희 여사 활동을 공적 시스템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을 수렴하는 작업부터 서두르고 있다. 김 여사를 담당할 제2부속실 설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장순칠 시민사회2비서관을 제2부속실장으로 내정하는 한편, 시설 공사가 끝나는 대로 제2부속실을 출범할 예정이다.
정치권에선 대통령실이 어떤 식으로든 인적 쇄신 카드를 활용할 것이란 관측이 높다. 이 경우 한 대표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닌, 용산의 독자 브랜드로 비춰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전략이다. 한 대표 등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김 여사 라인 정리가 아니라, 국정 후반기를 맡을 참신한 적임자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국민의힘 한 다선 의원은 “대통령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독자적 판단이 아닌 여당 대표의 공개 압박형 요구에 떠밀려 인사를 하는 것은 레임덕을 자초하고 여권 전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지방선거 준비가 본격화되는 내년인 만큼 어차피 쇄신형 인사가 머지않아 나올 수밖에 없다. 꼼꼼히 준비해 국면을 전환하는 감동형 인사 카드를 준비할 것”이라고 점쳤다.
하지만 당 내에선 윤 대통령이 그렇게 느긋한 상황은 아니라는 기류가 강하다. 당 안팎의 거센 인적 쇄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여권 전체가 거센 내홍에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와 맞닿아 있다. 대통령과 당의 동반 지지율 하락, 김대남 녹취록과 명태균 게이트 그 중심엔 김 여사가 자리 잡고 있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도 여론은 좋지 않다.
즉, 김 여사와 관련된 매듭을 풀지 않고선 여권이 출구전략을 마련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한 초선 의원은 “한동훈 대표가 김 여사 라인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것은 지금 모든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 대표라고 계속 용산이랑 싸우고 싶겠느냐”고 되물으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가 독대를 통해 어느 정도 접점을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