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년이’가 장안의 화제다. ‘정년이’는 한 소녀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의지를 내어 자아를 실현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다. 소리할 때 힘이 나고 소리할 때 사람을 모으는 정년이는 소리를 사랑하는 소녀였다. 엄마가 소리하는 것을 싫어해도 소용이 없다. 야단을 쳐도 포기하지 않고 가둬놓아도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의지란 것이 원래 발목을 잡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이므로.
엄마는 왜 그렇게 발목을 잡을까. 과거에 엄마가 발목을 잡혀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 속에서 발목을 잡힌 경험이 있다. 그 두려움에서 가까운 이들, 특히 자식의 발목을 잡지만, 부모가 발목을 잡힌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만드는 것이 삶의 진보가 아닐까. 정년이는 그 진보의 드라마를 쓸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좌절해온 엄마까지 구원하지 않을까.
그러니 그 드라마는 단순한 성공 드라마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의지의 자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드라마일 것 같다. 도대체 의지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의지를 가지는 것일까.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들어와 싹을 내고 있는 의지가 드러나 ‘나’의 춤을 추게 될 때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있는 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춤을 추는 자만이 강하다. 그는 충분히 힘을 뺄 수 있고, 그 경우에 비로소 삶이 사랑인 존재가 될 수 있다. 20년 만에 이현세 선생의 ‘천국의 신화’를 다시, 찬찬히 읽어가는데, 이 작품도 ‘정년이’처럼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왕좌의 게임’만큼이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의 신화’는 삶이 사랑인 존재, 창조주 여신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왜 창조주가 여신일까? 만물을 낳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없는 것 없이 모두 만들어내는 여신은 자신이 낳은 천지만물을 사랑했다. 그중에 뱀이 있었다. 뱀, 익숙하다! 이현세판 창세기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자신을 만든 존재를 몰라보고 대립하는 존재가 없다면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창조신화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다. 세상은, 대립과 갈등의 전쟁판이다. 숙제는 그 대립과 갈등을 누가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현세 선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해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도 몰라보는 사악한 용(뱀) 한 마리가 나타나 여신을 먹이로 요구하였다.”
누구를 ‘사악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감당하기 힘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엄청나게 분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악한 존재가 당신의 영혼이라고 해도 좋을 여신을 요구한다면? 여신을 등 떠밀어 바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은 없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면 어찌할까.
우리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있다. 공동체에서 버림을 받을까봐,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없을까봐 세상의 질서에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면서 초조해 해왔던 불안한 시간들, 여신을 등 떠밀어 뱀 앞에 가져다 바친 시간, 그런 시간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 의지와 사랑이 뱀의 뱃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신은 멋있다. 여신은 자신이 낳은 것이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상황에서도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여신은 정면 승부한다.
“‘나를 주면 진정 물러가겠느냐?’ 사악한 용이 약속하므로 여신은 인간을 버리고 스스로 용의 입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을 버리고 스스로 용의 입으로 걸어 들어간 여신, 사랑의 힘이 크니 희생까지도 사랑이다. 그녀가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의 시대가 열린다. 인간은 자기를 낳은 여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천국의 신화’를 읽는 물음이고 우리의 근원적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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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