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내막을 발표할 거야. 계엄군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들어가 서버를 가져갔잖아? 이제 부정선거의 진상이 밝혀지면 세상이 뒤집어지겠지.”
전화가 온 직후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는 담화가 있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대통령이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데?”
“서버가 포렌식이 되려면 2주일이 걸려. 지금 그걸 준비하고 있을 거야. 겉으로는 일단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전략이겠지.”
주위에서는 그 친구가 미쳤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군을 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보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발언을 여러 번 했었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과 함께 출국금지를 당하고 국헌문란의 내란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이라는 뉴스를 봤다. 법률가로서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내란죄가 되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45년 전 비상계엄 시 신군부는 법을 압박해서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의 내란 목적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대법관들 대부분은 내란 목적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 의견을 제시한 대법관들이 모두 쫓겨났다. 법은 시국에 따라 물풀같이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했다.
신군부의 시각에서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은 폭도였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신군부의 군인들이 폭도가 되어 법정에 섰다. 내란죄의 주체가 바뀐 것이다. 나는 그 법정에 있었다. 검사가 12·12 군사 반란의 기획자이자 정국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허화평에게 물었다.
“비상계엄의 요건은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사변이나 적의 포위공격이 있을 때 발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5월 17일 당시 비상계엄의 요건이 있었다고 봅니까?”
전두환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허화평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비상계엄의 요건을 누가 판단하느냐도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내란죄인이 되어 재판을 받는 지금은 법과 국민 여론이 그 요건을 심사하는 시대고 계엄이 선포된 당시는 대통령이 통치행위의 일환으로서 상황을 판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권력의 주체와 그 반대세력은 상황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당시 재야 세력은 대통령과 총리의 퇴진을 일방적으로 요구했습니다. 합법적인 대통령과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 경우 전국적으로 시위를 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에 대한 정부 측의 선택여지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위기로 봤습니다. 물론 재야 세력은 위기가 아니라고 봤지만 말입니다.”
윤 대통령의 내면의 세계와 상황인식은 어땠을까. 내란죄는 목적범이다. 대통령과 동원된 군인들에게 내란목적이 있었을까.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계엄이 해제됐다. 법은 정치세력 간 일어나는 증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말고 국헌문란에 대해 판단해야 할 것 같다.
45년 전 비상계엄은 견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 국회는 의결로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게 법적인 통제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그 법의 힘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150분 만에 끝이 났다. 법이 지켜졌다.
시민의식도 높아졌다. 군인 1000명이 오면 10만 명의 시민이 몰려드는 시대가 됐다.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군인들이 탄 차 앞에 누워 “나를 밟고 가라”며 저항했다. 군인들 앞을 막아서며 총부리를 잡고 늘어지는 여성도 있었다.
한 시민은 군인들에게 “여러분이 들고 있는 총은 국민들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사용해 달라”고 말하자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민주주의는 법전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피와 살에 새겨져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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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