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어느 동·어느 층에 살든 비슷한 수준 주거환경 누려야…도시계획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안전·위생”
공공건축가 제도는 2013년 잠실5단지와 가락시영아파트를 시범단지로 시작됐다. 건축 전문가들이 민간 재건축에 자문하면서 시장성과 공공성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정진국 교수는 이 제도의 극초기부터 활동한 몇 안 되는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이다. 건설사와 시공사가 수익성을 고민할 때 정부와 자치단체의 입장에서 전문가로서 프로젝트에 공공성을 입히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12월 31일 서울 공공건축의 새 지평을 연 정진국 교수(예술사 박사)를 그가 설립한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만났다. 토포하우스는 ‘텃집’이라는 뜻으로 한 곳을 떠나지 않는 새를 텃새라고 부르는 것처럼 변함 없이 그 터를 굳건히 지키는 집이라는 의미다. 토포하우스는 바우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처럼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선다. 이곳에는 그의 건축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25년 우리의 도시 공간은 기후 위기와 인구 구조 변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도시 계획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온 정진국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성냥갑' 아파트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가 참여한 둔촌주공, 헬리오시티의 설계 철학을 통해 미래 도시 계획 비전을 들어봤다.
—서울시 공공건축가 제도가 정식 도입되기 전부터 활동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는 도시 공간이 개별적으로 파편화되지 않도록 전문가들이 협력하는 시스템이다. 유럽의 ‘시티 아키텍트’(City Architect) 제도를 모델로 했다. 건축가들이 도시 행정에 참여해 더 나은 도시 공간을 만드는 거다. 처음에는 명예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지자체마다 확산되고 있다.”
—초기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헬리오시티(가락시영아파트)는 아파트 단지 시가총액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였나.
“헬리오시티(헬리오)는 원래 가락시영아파트였고, 9510세대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서울시가 공공건축가 제도를 도입하면서 첫 번째로 맡긴 프로젝트였다. 단지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세 가지 요소였다. 햇빛, 바람 그리고 숲이다. 이 세 가지를 단지 내 어떤 동에 살든 모든 세대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헬리오시티’라는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알려졌다. 어떤 의미가 담겼나.
“첫 이름은 헬리오시티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에 ‘헬리오폴리스’를 제안했다. 헬리오는 태양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영구 음영이 생기지 않는 단지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나중에 ‘폴리스’가 경찰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어서 ‘시티’로 바뀌었다. 사실 나는 가능하면 한글 이름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 경우는 태양의 도시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다.”
—헬리오는 중앙공원인 ‘파크밴드’가 편도 1km로 설계돼 있다는 게 눈에 띈다.
“헬리오는 400m×1km 직사각형 부지에 들어선 대단지다. 이 긴 부지를 가로지르는 ‘파크밴드’는 단지의 동서를 잇는 1km 길이의 녹색 띠로, 단순한 보행로가 아닌 단지의 중심 축 역할을 한다. 단순한 선형 공원이 아니라 3개 층으로 입체화된 복합 커뮤니티 공간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층마다 다른 기능을 배치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공간은 단순한 통로나 상업 시설이 아니다. 어린이집, 도서관, 주민 커뮤니티 센터 등 생활에 필수적인 시설들을 모두 이곳에 집중 배치했다. 마을 공동체 중심 공간이 되길 바랐다. 9510세대가 넘는 대단지에서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런 발상 근간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철학이 있다. 그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집에 빠짐없이 담아야 한다고 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특이한 형태를 추구하기보다 빛과 바람, 녹지 그리고 주민들의 교류라는 기본적 요소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헬리오 입주 후 내가 생각한 이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얼마 전 방문해봤는데,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덜 개방적이긴 했지만 주민들의 생활 동선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도시 안의 섬이 되지 않으려면 이런 공공 공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국내 최대 규모 단지인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과 이전 1위였던 헬리오, 두 메가프로젝트 모두 공공건축가를 맡았다. 최근 입주를 시작한 ‘단군 이래 최대 단지’라는 둔촌주공은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나.
“올림픽파크 포레온(포레온)은 1만 2000세대가 넘는 초대형 단지다. 직사각형인 헬리오와 달리 800m×800m의 정사각형 부지다. 이를 남북으로 두 개, 동서로 두 개의 숲길을 격자로 배치해 전체적으로 9개 구역으로 나눴다. 마치 바둑판처럼 구획을 나누되 각 구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헬리오에서 시도했던 개방성의 개념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개방성’이라는 개념을 포레온에서는 어떻게 구현했나.
“단지가 도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는 게 핵심 철학이었다. 요즘 아파트 단지들은 게이트를 설치해 경계를 만들지만, 나는 그런 물리적 경계 없이 주변과 어울리는 도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9개 구역을 가로지르는 숲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만나는 동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 방문해보니 게이트가 설치돼 있었다. 들어보니 ‘게이트는 어쩔 수 없다’고, ‘단지 사람들 정체성, 자부심을 위해서는 꼭 해야 한다’고 하더라. 아파트가 기본적으로 내 개인적인 재산이지만 개방성이라는 공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오게 한다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자유롭게 연결되고 자유로운 소통이 돼야 한다.”
—포레온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게 브릿지다. 이런 구조물을 도입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단지 북쪽에 생태공원이 있다. 엄청난 대단지기 때문에 끝과 끝의 주거 환경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격차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800m를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한 번에 걸어갈 수 있도록 명일로 위에 브릿지를 설치했다. 생태공원과 가장 멀리 사는 단지 주민도 도로에 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생태공원으로 갈 수 있도록 해서 동등한 혜택을 누리도록 했다. 사실 단지 안의 모든 보행로는 공간적·환경적으로 풍요를 선사하는 공원의 일부가 돼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설계 철학이 담긴 포레온이 입주를 시작했다. 어떤 공간이 되길 기대하나.
“포레온은 단순한 주거 단지를 넘어선 하나의 작은 도시다. 1만 2000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내가 강조한 개방성·연결성·평등성이라는 가치가 실제 주민들의 삶 속에서 구현되길 바란다. 물론 내가 의도한 것과 실제 운영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도시 안의 폐쇄적인 섬이 아닌 도시와 함께 호흡하는 열린 공간이 됐으면 한다.”
—두 메가프로젝트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 번 언급했듯 ‘평등’이다. 어느 동 어느 층에 살든 비슷한 수준의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향을 따져 남향이냐 북향이냐로 차등을 두지만, 나는 그런 차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모든 세대가 빛과 바람, 녹지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아파트를 향해 흔히 ‘성냥갑’ 아파트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흔히 판상형 아파트를 비판하지만, 실은 이게 우리나라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다. 통풍과 채광이 매우 우수하다. 둔촌주공 프로젝트를 하는데 과거 둔촌주공에서 나고 자랐다는 주민 이인규 씨가 찾아와서 추억을 이야기하더라. 이 씨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프로젝트를 하며 추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그때 많은 걸 느꼈다. 그동안 소위 모더니즘 건축 일부인 박스형 아파트를 두고 ‘삭막하다’, ‘그 안에 사는 삶은 얼마나 황폐하냐’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건물이 막 비틀어지고 지나치게 이상한 모양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모더니즘 건축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안의 추억을 얘기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모더니즘 건축이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더 발전된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도시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도시 안전과 위생이다. 이태원 참사에서 보듯 우리 도시의 안전 요소 고려가 아직 부족하다. 도시에 범죄가 많다는 게 아니라 골목 사이 간격, 건물 사이 버려진 공간, 툭 튀어나온 부분, 어두운 부분 등 도시 전체를 공간적·기능적으로 연구해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상업시설만 봐도 서비스 동선과 고객 동선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고 있고, 화장실이 굉장히 낡은 경우가 많다. 그런 기본적인 발전을 통해 좀 더 효율적인 도시가 됐으면 좋겠다. 또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미래에도 유효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지금 사는 사람이 너무 불편하진 않은지 따져봐야 한다. 그걸 해결하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비판해 왔던 모더니즘 건축이 필요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건축의 본질은 뭔가.
“2000년 전 비트루비우스가 말한 건축의 세 가지 요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튼튼함(Firmitas)’, ‘유용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이라는 이 세 가지 가치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뤄야 한다. 튼튼함이 없는 기능은 위험하고, 기능 없는 아름다움은 허상이며, 아름다움이 결여된 건축물은 그저 구조물에 불과하다. 이는 도시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균형, 수익성과 공공성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우리나라 아파트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서구에서는 서민용 주거형태인 아파트가 우리는 고소득층의 재산증식 수단이 됐다.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파트 단지를 도시 안의 섬이 아닌 도시와 함께 호흡하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튼튼함’, ‘유용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아닐까.”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