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태 후 ‘1987년 체제’ 한계론 봇물…이 대표 “내란 극복 집중할 때” 회의적 전망 우세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탄핵 정국에서 개헌이 화두로 떠올랐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고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행 대통령제는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한 1987년 민주화를 거치며 탄생했다. 독재 정권을 막자는 의도가 컸지만, 개헌 이후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는 반복됐다. 민주화 이후 당선된 대통령 8명 중 3명이 퇴임 후 구속됐고, 3명은 재임 중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본인 또는 가족 비리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여야 대권주자들과 시민단체, 학계 등은 개헌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4년 12월 19일 우원식 국회의장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개헌의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1987년 개헌 이후 40년 가까운 시기의 변화를 헌법에 담아내고 있지 못해 지금 여러 가지 병리 현상들이 생기고 있어 개헌을 주장해왔다”며 “대통령에게 너무 집중된 권력 때문에 여러 오판과 대통령 주변에서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2024년 12월 31일 여야 정치 원로들은 권력구조 개혁에 초점을 맞춘 개헌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원기 문희상 정세균 박병석 김진표 전 국회의장, 정운찬 이낙연 전 국무총리, 서청원 황우여 손학규 전병헌 등 여야 정당 전직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최근 반복되는 대통령 탄핵 정국의 근본적 원인은 제왕적 대통령과 단원제 국회의 충돌을 중단·조정하는 제도적 장치가 헌법상 전무하기 때문”이라며 “‘선 개헌, 후 정치 일정’의 원칙하에 대통령 탄핵 심판 기간 중 개헌을 마무리해달라”고 요청했다.
1월 9일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니어재단 주최로 열린 ‘개헌 세미나’에서 “대통령 권력이 사실상 삼권분립을 넘어서고 있다. 정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임명권을 통해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인 법원, 헌법재판소에도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라며 “대통령제에 의한 승자독식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해 정부와 여당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실패를 통해 차기 정권을 잡으려 정부 정책의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개헌특별위원회’를 거론하며 개헌을 띄우고 나섰다. 1월 19일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조만간 (당 차원의) 개헌 특위를 구성해 개헌 논의를 시작하겠다”며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어서 대부분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불행한 일을 겪게 됐다. 개헌해야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며 “40년 된 1987년 체제가 바뀔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바꿔야 더 이상 불행한 사태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야권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김동연 경기지사는 이재명 대표를 압박하고 나섰다. 김 전 총리는 1월 22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재명 대표가 대선에 나온다면 개헌 시점과 내용을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1월 13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2022년 대선 직전 당시 이재명 대표와 단일화하면서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책임총리제 등을 공약했다”며 “이 부분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이 대표와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여론도 개헌에 우호적인 상황이다.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월 1일 공개한 신년 여론조사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61%에 달했다. 개헌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30%에 그쳤다. 아울러 권력구조에 대한 개헌 방향에 대한 질문에서 4년 중임 대통령제(37%), 분권형 대통령제(12%), 의원내각제(9%) 등 현행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58%로 더 우세했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택한 응답자는 31%에 불과했다.
1월 1일 공개된 중앙일보·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에서도 ‘개헌 논의를 빠르게 시작해야 한다’는 응답이 60%였다. 개헌 시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60%는 차기 정부 출범 이전에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중 34%는 ‘지금부터 논의해 최대한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라고, 26%는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완료된 후 추진’이라고 응답했다(여론조사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
하지만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개헌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 내란 수사와 탄핵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개헌 이슈로 논점을 흐려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2024년 12월 25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개헌과 거국내각 제안은 내란·외환의 우두머리 윤석열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음모”라며 “민주당 인사 중에서도 과거에 4년 중임제나 거국내각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을 끌어들여 거국내각으로 가고 개헌 움직임을 만들어내려는 게 저들의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조기 대선 시 당선 가능성 높은 이 대표가 개헌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민주당에선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민주당 한 의원은 “여당이 윤 대통령 내란 사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옹호하고 있지 않냐”며 “이런 상황에서 여당과 권력구조 개헌을 논의하자고 어떻게 이야기하나. 우선 윤 대통령 내란 사태에 대해 책임을 묻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재명 대표는 2022년 대선 때 ‘4년 중임제’ 등 개헌 추진을 공약한 바 있다. 김용민 민형배 장경태 문정복 등 친명계 의원들을 주축으로 ‘대통령 임기 단축 개헌연대 준비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1월 23일 이 대표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지금은 내란극복에 집중할 때라는 것이 내 생각”이라며 개헌에 선을 그었다. 이번에도 물거품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이 대표가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도 적지 않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개헌 국면으로 넘어가면 주도권을 뺏길 수 있는 만큼 민주당에서 지금 당장 개헌을 이야기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비명계의 압박이 강화되면 이재명 대표도 불가피하게 개헌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선 가까워질수록 비명계를 포용해야 한다. 내란 및 탄핵 정국에서도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지지율이 주춤하고 있다. 윤 대통령도 문제지만, 이 대표도 현행 대통령제에선 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