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선 성공 드물어, 티웨이 인수 시 1호 가능성…밸류업 노력 자극, 주가 부양 동력 될지 주목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경영권을 잃은 사례는 2022년까지 국내에서 한 건도 없었다. 대한항공을 지배하는 한진칼 경영권을 두고 그룹 총수 일가와 강성부 대표가 이끄는 KCGI가 벌인 경쟁이 그나마 ‘성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례였다. 한진칼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막판에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이 그룹 총수일가 편에 서면서 결국 무산됐다.
국내에서 넓은 범위의 적대적 M&A 성공 1호는 2023년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다. 최대주주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보유지분을 하이브에 매각하는 데 맞서 이사회가 카카오와 손잡고 공개매수로 경영권을 확보한 사례다. 경영진이 카카오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적대적’이라고만 보기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간 국내에서는 최대주주가 이사 선임 등 경영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경영진이 최대주주와 정면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다.
현재진행형인 한미약품과 고려아연 경영권 경쟁은 이사회와 최대주주 간 대결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적대적 M&A로 보기는 어렵다. 한미약품은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2대주주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가진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개입하면서 주가 변동성도 크지 않았다. 반면 고려아연은 이사회를 지배하는 최윤범 회장과 최대주주인 영풍 측이 공개매수와 장내매집 경쟁까지 벌이면서 주가가 경영권 경쟁 전 대비 최대 3배까지 오르기도 했다.
한미약품은 신동국 회장과 손잡은 송영숙 한미사이언스 회장의 판정승이 예상된다. 송영숙 회장과 맞섰던 아들들은 현재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지만 의결권에서 절대 열세다. 양측의 타협 가능성이 점쳐진다. 반면 고려아연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최근 시작된 대명소노그룹의 티웨이항공 경영권 인수 추진은 가장 전형적인 적대적 M&A 성공사례 1호가 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대명소노그룹은 티웨이항공 최대주주는 물론 이사회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대명소노그룹은 지난해 7월 재무적투자자(FI)인 사모펀드 JKL파트너스 보유지분을 장외에서 매입하면서 2대주주에 올랐다. 주식보유 신고를 하면서 대명소노그룹은 경영참여 목적임을 분명히 밝혔고 최근에는 경영권 확보를 공식 선언했다.
대명소노그룹의 티웨이항공 지분율은 26.77%로 최대주주인 예림당 등의 29.7%에 3%포인트(p) 이내까지 근접했다. 오는 3월 정기주총에서는 7명의 이사 중 임기 만료되는 4명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 양측 간 치열한 표 대결이 예상된다.
국내에서 지분경쟁이 시작된 기업들의 공통점은 우량하지만 주주 환원이 부족한, 오랜 기간 주가가 저평가된 곳이다. 경영권에 도전하는 입장에서는 싼값에 주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주가를 높이지 못하면 그만큼 경영권이 도전 받을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다.
다만 재계에서는 주주 환원과 주주 중심 경영을 강화해 주가를 높이기보다는 포이즌 필(Poison Pill·신주인수선택권)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제도적 방어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도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을 허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집중투표제 등 주주권을 보장하고 적대적 M&A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들도 갖추고 있다. 일본도 증시 밸류업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과 비슷한 제도를 채택했다.
일본은 2005년 닛폰방송(NBS)에서 라이브도어와 후지TV 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적대적 M&A 시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 장치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정부와 의회는 방어수단이 주주이익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정립해갔다. 적대적 M&A 시도가 경영진에 대해 주주이익 보호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다만 일본에서도 아직 전형적인 적대적 M&A가 성공한 사례는 없다. 적대적 M&A 시도가 빈번하고 성공률도 20~30%에 달하는 미국과는 차이가 크다. 유럽은 주주 평등을 고려해 경영권 방어 수단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보다는 적대적 M&A 사례가 적다. 유럽연합이 독점을 우려해 M&A를 승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끝난 줄 알았는데…고려아연 경영권 대결 새로운 국면
영풍·MBK 쪽으로 기우는 듯했던 고려아연 경영권 대결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표 대결에서 법 대결로 바뀌는 모양새다. 지분율에서 절대 우세한 영풍이 인수합병(M&A) 경험이 많은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았음에도 승부를 짓지 못하는 배경에도 최윤범 회장 측의 법률자문단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먼저 최윤범 회장은 본인이 미국에서 M&A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번 경영권 경쟁에서 법률자문도 국내 최고로 꼽히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맡겼고, 서울고법 부장판사 출신 등 11명의 변호사가 최 회장을 돕고 있다.
최윤범 회장은 또 고려아연 경영권 경쟁과 관련된 민사소송은 이 부문에서 경험이 많은 법무법인 화우에 별도로 맡겼다. 화우는 지난해 발생한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에서 이수만 창업자를 대리해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 인용을 이끌었다. 2020년 한진칼과 사모펀드 KCGI의 경영권 분쟁에서도 한진칼을 대리해 가처분 기각 결정을 받아냈다.
영풍의 법률대리인은 법무법인 세종과 KL파트너스다. 김앤장이나 화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로펌들이다.
애초부터 영풍보다 지분율이 열세였던 최윤범 회장은 그동안 법을 활용해 여러 차례 반전을 이끌어냈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도 자사주 매입 형식의 공개매수를 성공시켰다. 최근에는 상호주식 보유를 금지하는 상법 369조를 활용해 임시주총을 열고 고려아연에 대한 영풍의 의결권을 무력화시켰다.
영풍은 14명의 이사를 새로 선임해 이사회 과반을 확보하려 했지만 고려아연은 임시주총에서 이사 수(현재 13명)를 19명으로 제한하는 정관 변경안을 통과시켰다. 3월 임기가 끝나는 이사들을 영풍 측 인사로 바꾸면 과반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임시주총에서는 집중투표제까지 도입됐다. 사실상 이사회 과반 확보는 물 건너 간 셈이다.
영풍은 상법 369조 적용이 잘못됐다는 입장이지만, 결과를 되돌리기는 어렵게 됐다. 소송을 하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최윤범 회장 측은 이사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경영권 방어 장치를 공고히 할 게 뻔하다.
설령 영풍이 묘수를 발휘해 고려아연 이사회 과반을 확보한다고 해도 또 다른 장벽이 작용할 수 있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경영권이 합쳐질 경우 국내 아연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행사하게 될 것이란 우려다. 독점 우려가 있으면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를 받아야 한다.
영풍·MBK는 경영권 분쟁 이전에도 영풍과 고려아연은 공정거래법 상 동일한 기업집단으로 분류됐던 만큼 기업결합 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기업결합 심사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경영권 분쟁을 겪으며 고려아연 지배구조가 크게 바뀌어서다. 김병주 회장 등 다수의 미국인 임원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모펀드 MBK가 고려아연 지분 7%를 직접 보유하는 것은 물론 기존 대주주인 영풍과 의결권 공동행사 계약까지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