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상표법은 선출원주의, 선사용자 정 교수 불리…상표로서 식별력 없으면 등록 거절될 가능성도
#정 교수가 따로 출원한 상표권은 없는 것으로 파악
지난해 4월 29일과 10월 4일 ‘저속노화’ 관련 복수의 상표권 3건이 특허청에 출원됐다. 지정상품은 30류(도정한 곡물·쌀·보리·현미)·35류(미량영양소·식이보충제 소매업)·43류(간이음식점업·커피전문점업) 등으로 출원인은 ‘저속노화 식사법’의 저자이자 정희원 교수가 아닌 제3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저속노화’와 관련해 정 교수가 따로 출원한 상표권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저속노화는 건강한 식단, 충분한 수면, 꾸준한 운동 등을 통해 노화 속도를 늦추는 건강관리 방식으로 지난해부터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정희원 교수는 저속노화와 관련된 개념을 대중화한 의사 겸 작가다.
저속노화 개념이 유명해지면서 정희원 교수와 국내 기업들의 콜라보 상품도 앞다퉈 출시되고 있다. 올해 1월 8일에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정 교수와 함께 저속노화 간편식 시리즈를 개발해 선보였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11월 정 교수의 레시피를 활용한 잡곡밥을 출시해 출시 두 달여 만에 누적 매출 12억 원, 누적 판매량 42만 개를 돌파하기도 했다.
해당 상표권들은 모두 저속노화 개념이 대중화된 이후에 등장했다. 김동현 마일스톤 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는 “본인들이 사업을 하려고 상표권을 출원했을 수 있다. 이 상표권이 등록될 경우 정 교수나 해당 기업들의 마케팅을 통해 저속노화라는 개념이 더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질수록 이들에게 반사이익이 돌아갈 확률이 높아진다”라며 “혹은 상표권 브로커일 가능성도 있다. 출원 상태에서도 양도가 가능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브로커들이 상표를 등록해둔 후 선사용권자(제3자가 상표를 등록하기 전에 먼저 사용하던 자)에게 상당한 금액을 요구하며 상표를 넘기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걸 막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정희원 교수는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해당 문제를 인지한 후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희원 교수가 보유한 ‘저속노화’ 관련 상표권이 따로 없다. 우리 상표법은 선사용주의가 아닌 선출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상표출원일을 기준으로 해 먼저 출원한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이준석 로한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는 “선사용자가 이미 출원된 제3자의 상표권을 없애고 싶은 마음은 있겠지만 쉽지 않다. 본인이 먼저 사용했다고 해도 따로 상표권을 확보해둔 바가 없다면 선출원한 상표의 권리가 우선”이라며 “정 교수님이 ‘저속노화’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브랜딩도 하셨지만 사실 캐치프레이즈에 가깝고 그것만으로 전반적인 상표권을 독점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정희원 교수가 선사용권자로 인정받을 경우 상표 등록 전까지는 정보제공 제도를 통해, 출원공고 이후에는 이의신청 제도를 통해 특허청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선사용권자로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정 교수가 ‘저속노화’란 단어를 상표로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허사무소 공앤유의 공우상 대표 변리사는 “저속노화라는 단어나 개념이 아니라 김밥이나 빵이나 커피 등 특정 상품의 상표로서 알려졌어야 상표권의 선사용권자라는 조건이 충족된다. 지금 단계로선 조치를 취하기 쉽지는 않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특허청에서 ‘식별력이 없음’으로 보고 거절할 수도”
한편에서는 제3자가 출원한 ‘저속노화’ 상표 등록이 거절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식별력’이 관건이 될 전망이다. 상표법 상 식별력을 인정받으려면 해당 상표가 특징적이고 구분이 가능해야 한다. 고유성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특허사무소 공앤유의 공우상 대표 변리사는 “맛있는 밥집, 맛좋은 김밥 등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상표로서 식별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저속노화 음식 역시 고유한 상표가 아니라 ‘노화를 느리게 하는 음식’으로 기능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상표로 아예 등록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박민흥 와이즈업 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는 “저속노화라는 것은 보편적인 뜻을 지닌 단어이기 때문에 특허청에서 ‘식별력이 없음’으로 보고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라며 “35류처럼 식이보충제 소매업의 경우 해당 상표가 붙은 식이보충제가 노화를 늦춰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 식별력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이준석 로한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또한 “예컨대 의류 브랜드로 ‘저속노화’ 상표를 출시하면 식별력이 있다. 그런데 30류의 경우를 보면 소비자들이 저속노화 기능이 있는 쌀로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식별력 문제가 생긴다”라고 밝혔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을 경우 특허청이 심사 단계에서 면밀히 들여다보고 상표 등록을 거절할 수도 있다. 2019년 4월 EBS TV 등에 등장한 인기 캐릭터 ‘펭수’의 경우 같은 해 11월 제3자가 상표를 선출원하면서 상표권 논란이 불거졌다. EBS 상표 출원이 늦어지면서 상당한 가치를 지닌 펭수 상표를 다른 사람이 가로챌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특허청이 이미 널리 알려진 ‘펭수’ 상표를 제3자가 출원한 것과 관련해 적절하지 않은 권리자가 부정한 목적으로 타인의 상표를 선출원한 것으로 판단해 상표 등록을 거절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2020년 7월에는 포항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 자영업자 A 씨가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해 자신만의 레시피로 개발한 덮죽을 소개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같은 달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자영업자 B 씨가 ‘덮죽’으로 상표를 선출원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특허청이 ‘덮죽’ 상표의 등록을 거절하자 B 씨는 상표등록 거절결정 불복심판을 청구했다. 이와 관련해 특허심판원이 ‘덮죽’은 죽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로 식별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인이 상표로 독점하는 것이 공익상 적합하지 않다’고 규정하면서 최종 기각했다.
‘저속노화’ 상표권은 아직 심사 대기 상태다. 통상 출원한 지 12~13개월 후 심사관이 배정되고 약 6개월 후 최종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각각 지난해 4월과 10월에 출원된 해당 상표권의 등록 여부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가 돼야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특허청 대변인은 “아직 심사를 거치지 않은 상표권과 관련해서는 특허청에서 공식 입장을 밝힐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일요신문은 구체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 정희원 교수에게 연락했으나 닿지 않았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