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은 잠재우고 족쇄는 풀어주고’
▲ 재판 중인 삼성 현대차 SK 임원들이 올 연말쯤 대법원 판결을 받고 내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사면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연말 정몽구 현대차 회장, 노무현 대통령, 최태원 SK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부터)의 회동. | ||
3대 재벌이 기소된 시점은 모두 제각각이다. 그런데 3대 재벌 인사들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몰려 대법원 판결을 받게 될 것이란 관측이 법조계와 재계에 퍼져 관심을 끌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사장은 지난 2003년 12월 기소돼 2005년 10월 1심, 올 5월 2심을 거쳤다. 3년 6개월간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단이 재판에 목을 매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지난해 4월 구속수감 이후 6월 보석 석방, 올 1월 1심을 거쳐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삼성에 비하면 짧은 재판기간이지만 그룹 총수의 구치소행을 겪었고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지 못해 정 회장이 현재 보석 상태란 점에서 삼성에 비해 ‘짧고 굵은’ 여정을 보내온 셈이다. 항소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현재로선 대법원까지 가게 될 것이란 관측이 대체적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삼성 현대차를 모두 압도한다. 1조 5000억 원 규모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기소된 최 회장은 2003년 2월 구속수감 돼 7개월이 지나서야 보석 허가를 받아 서울구치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2003년 6월 1심에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받고 9월에 보석으로 나와 2005년 6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까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재판을 받는 동안 해외투기 자본 소버린의 지배권 위협과 최근 지주회사제 전환 선언 등의 굴곡을 겪다보니 삼성 현대차에 비해 재판에 대한 긴장감은 다소 떨어져 보인다.
‘회사에 피해를 끼쳤다’는 죄목은 공통되지만 기소 시점과 재판 진행 속도가 각기 달랐던 세 재벌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한 시점에 몰려서 이뤄질 것이란 관측의 배경엔 정치 일정이 깔려 있다. 올 12월 19일엔 제17대 대통령 선거, 내년 2월엔 새 정부 출범, 그리고 내년 4월엔 제18대 총선이 열리는 데 시선이 쏠리는 것이다.
삼성과 현대차 그리고 SK 관련 재판을 처리하는 법원은 항상 고민 거리를 안고 있게 마련이다. 국내 경기 부양과 기업의 해외 경쟁력 문제를 거론하는 재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반면 형평성 논란을 부르짖는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비난여론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어찌 보면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보다 최종 판결을 내리는 법원이 더 큰 부담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는 최근 안영욱 서울중앙지검장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건희 회장 기소 여부와 관련해 허태학-박노빈 피고인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사실상 수사를 유보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부 또한 이 같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나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을 주요 재벌총수들에게 당부하면서 그들의 기업이 재판 받느라 대외 활동이 위축되고 빗발치는 비난여론의 도마 위에 수시로 올라오는 것에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관계 호사가들은 법원과 정부가 지닌 고민의 공통분모를 토대로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주요 재벌들 관련 재판과정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두산그룹 총수일가의 예를 들기도 한다. 회삿돈 횡령 건으로 기소돼 지난해 1심과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두산 박용성-박용만 형제는 대법원 항소를 포기한 뒤 올 초 정부의 특별 사면을 받아 모든 근심을 털어버렸다. 박용성 회장은 두산그룹을 이끄는 동시에 IOC 위원 자격으로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으로 국제무대를 누비며 ‘언제 재판을 받았나’ 싶을 정도의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몇몇 재계 인사들은 ‘지난 2005년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 직후 최태원 SK 회장이 대법원 항소를 포기했더라면 올 초 특별사면 명단에 최 회장 이름이 포함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물론 뒷북치는 소리지만 이 같은 상상은 올 말과 내년 초 상황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다수 법조계 인사들은 삼성 현대차 SK 관련 대법원 판결이 올 말이나 내년 초에 몰려 내년 3월 이전에 마무리 될 가능성을 거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일단 대법원 판결이 항소심 판결 내용의 법리적 해석에 주력해온 전례를 감안할 때 항소심 판결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법원 결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삼성 에버랜드 측 피고인들이 얼마 전 항소심에서 검찰 공소사실(970억 원)의 10분의 1(89억 원)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해서만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보면 세 재벌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항소심보다 낮아질 가능성도 조심스레 짐작해볼 수 있다.
세 재벌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실형 이하 수준이라면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2월 혹은 3·1절에 맞춰 단행될 대규모 특별 사면 리스트에 포함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용성-박용만 형제와 비교하면 3대 재벌 인사들이 특별사면 명단에 오르지 못할 까닭도 없다. 만약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해준다면 해당 재벌 입장에서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여론의 눈매가 아직은 매섭다.
일부 법조인들과 정치권 인사들은 세 재벌 간의 ‘대법원 판결 먼저 받기’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아직 현대차 항소심도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다소 때 이른 관측이긴 하다. 그러나 세 재벌 중 한 곳이 먼저 항소심보다 낮은 형량의 대법원 선고를 받을 경우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일어나 추후 판결을 기다리는 재벌과 해당 재판부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말 대선 못지않게 호사가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도 있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