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탑 사고 현장 대신 매헌시민의숲에 세워져, 백화점 부지엔 아크로비스타 건축…참사 기억공간 조성 애 먹어

6월 25일 새벽 5시 삼풍백화점 참사 유족 진옥자 씨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시민의숲에 위치한 삼풍참사위령탑을 찾았다. 진 씨는 비석에 새겨진 딸 이름을 어루만진 후 정성껏 위령비를 닦았다.
평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추모식을 앞두고서는 매일 위령비를 청소하는 진 씨는 삼풍 참사로 딸을 잃었다. 참사 당시 진 씨는 실종된 딸을 찾아 백화점 잔해가 버려진 난지도를 헤맸지만 딸을 수습하지 못했다. 진 씨는 “난지도에서 그렇게 많은 뼛조각을 주웠는데 우리 애는 없었다”며 “딸의 넋이라도 올 것 같아 망원동을 떠나지 못한다”고 딸을 그리워했다.
1995년 6월 29일 참사가 일어난 이후 삼풍백화점 잔해는 난지도로 옮겨졌다. 유족들은 이 과정에서 시신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한다. 유족들은 직접 곡괭이와 호미를 들고 난지도를 파헤쳤다. 많은 시신과 유류품을 찾았지만 32명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처럼 난지도는 유족들의 아픈 기억과 참사 미수습자가 묻힌 곳이다. 지금은 난지도 위로 노을공원이 들어선 상태다. 다만, 미수습자를 기리는 표식은 없다.
유족회와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6월 17일부터 노을공원에 미수습자 표지석 설치를 위한 시민 서명을 받고 있다. 캠페인을 기획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김정숙 대리는 “최근 유족분이 종종 노을공원을 찾아 절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그곳에 표지석을 세워보자는 제안을 했더니 상당히 기뻐하셨다”고 추진 배경을 밝혔다.
#사고 현장에 세우지 못한 위령탑
삼풍백화점 참사 기억공간은 사고 현장에 없다. 삼풍참사위령탑은 사고 현장에서 약 4km 떨어진 매헌시민의숲 끝자락에 세워졌다. 참사와는 관련이 없는 장소다. 원래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위령탑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역 주민의 반대와 보상금 마련을 위해 삼풍백화점 부지를 팔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김의재 당시 서울 행정1부시장은 “(유족이) 보상으로 써야 할 땅에 위령탑을 지어달라고 하는 모순된 말씀을 하고 계신다”며 “꼭 삼풍백화점 자리에 위령탑을 지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보상 재원 마련을 위해 삼풍백화점 부지를 몰수하고 이를 경매에 내놨다. 참사 이듬해인 1996년 대상그룹에 토지가 매각됐고 2004년 주상복합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가 사고 현장에 세워졌다. 현재까지 사고 현장에는 아무런 기억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다.
유족인 정군자 씨는 “상가는 그렇게 많이 지어졌던데 위령탑을 위한 자그마한 땅이라도 내어줄 순 없었냐”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족들은 당시 양재시민의숲에 위령탑을 조성하는 것으로 서울시와 합의했다. 그러나 서초구의회의 동의를 받는 과정에서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의원들이 공원에 위령탑을 짓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이종호 당시 서초구의원은 “서초구민 전체가 공유하는 휴식 공간에 위령탑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냈다. 우여곡절 끝에 탑 높이와 면적을 줄인 후에야 서초구의회는 사용승인동의안을 가결했고, 참사 3년이 지난 1998년 6월 29일 위령탑이 세워졌다.

사회적 참사의 기억공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는 삼풍 뿐이 아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피해자를 추모하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대표적이다. 개관 당시 ‘추모 공원’ 등 참사를 기억하는 명칭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주변 상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또한 공원에 있는 위령탑은 ‘안전조형물’로 불리고 희생자를 수목장한 묘역은 이름도 없다. 유가족이 명칭 변경을 요청하고 있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매년 추모식마다 주변 상인의 반대 집회가 이어지고 있어 유족은 고통 받고 있다.
1999년 화재로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한 23명이 숨진 화성 씨랜드 참사도 기억공간 조성에 진통을 겪었다. 참사 26년 만인 올해 3월 17일 사고 현장 인근에 추모 조형물 건립이 시작됐다. 화성시가 2017년 기억공간 조성 계획을 발표한 지 8년 만이다.
그동안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서 60km가량 떨어진 서울 송파구 마천동 송파안전체험교육관에서 추모 행사를 해왔다. 반면 사고 현장에서는 씨랜드 대표가 대형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며 공분을 사기도 했다.
유엔 피해자 권리장전은 피해자에 관한 기념과 헌사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여러 기억공간은 ‘혐오시설’ 취급을 받으며 사고 현장에서 동떨어지거나 제대로 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미국 뉴욕의 9·11 메모리얼 박물관과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억공간이 사건 현장이자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점과 대비된다.
이태원 참사 기억공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예술감독인 권은비 작가는 “일상 안에서 참사와 조우할 때 우리는 참사를 방지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며 “애도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중심부로 들어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인턴기자 kmh293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