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엔 ‘러 제국 영광’ 재현할 전략적·상징적 요충지…우크라이나엔 산업·교통 중심지이자 서쪽 방어 요새

이 기간 탄광과 제철소가 돈바스 일대에 집중 건설되면서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왔고, 그렇게 돈바스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 사용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됐다. ‘라이프니츠 동유럽 및 동남유럽 연구소’의 역사학자 귀도 하우스만은 “이 시기만 해도 돈바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우크라이나어 사용이 제한되었고, 대신 러시아어가 공식 교육 언어로 자리 잡았다”라고 설명했다.
철강과 금속 제조업의 성장, 철도 건설, 그리고 항구 도시 마리우폴의 해운업 발전으로 돈바스는 석탄 채굴 지역에서 벗어나 점차 다각화되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30년 동안 돈바스의 경제력은 크게 약화됐다. 케임브리지대 우크라이나학 교수 로리 피닌은 “1990년대 돈바스의 경제 기반은 사실상 붕괴됐다”면서 “오늘날 돈바스는 한때 번성했던 미국 러스트 벨트 지역과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서서히 회복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우크라이나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돈바스는 사실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도네츠크 출신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은 친러 성향의 정치인으로, 이곳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하지만 2014년 축출된 이후 해외로 도피했고, 그 후 반러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2019년, 투표 결과로 표출됐다. 당시 선거에서 돈바스 지역 유권자들은 분쟁 종식과 우크라이나 주권 보호를 공약으로 내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실제 CNN이 러시아 침공 직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최동부 지역(돈바스를 포함)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거부했으며, 두 국가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대체로 반대했다. 반면, 러시아인의 약 3분의 1은 두 민족이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푸틴이 이번 전쟁에서 특히 돈바스 지역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은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돈바스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는 것을 ‘특별군사작전’의 핵심 명분으로 내세웠으며,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돈바스 지역의 인구 구조를 보면 2014년 기준, 우크라이나계는 57%, 러시아계는 38%다. 또한 도네츠크주 인구의 75%가, 그리고 루한스크주 인구의 69%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돈바스 지역은 러시아의 민족 정체성과 구소련 영향권 유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 2019년부터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과 시민권을 발급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선제적 조치이기도 했다.
푸틴이 돈바스를 노리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지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림반도를 병합함으로써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을 확보하게 된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연결시키는 육로가 필요했다. 현재 크림반도는 여전히 본토와 떨어진 외딴섬 같은 존재로, 2018년 개통된 케르치 해협 다리를 통해서만 본토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돈바스 전역을 정복할 경우, 마리우폴 항구를 통해 크림반도와 지중해로 연결되는 새로운 접근 통로를 확보하게 된다.
돈바스의 경제적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석탄과 철강뿐만 아니라 금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이 대량 매장되어 있는 이곳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돈바스의 경제적 중요성은 사실 러시아보다 우크라이나에게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우크라이나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려면 돈바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러시아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는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영구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러한 역사적 이미지가 여전히 푸틴의 세계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어쩌면 돈바스를 차지하려는 푸틴의 궁극적 목표가 자신이 처음 권력을 잡았던 당시의 소련을 재건하는 데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미국국가안보회의(NSC) 러시아 담당 국장을 지낸 애나 마칸주는 “푸틴은 자신이 러시아의 차르 같은 존재라고 믿는다. 신에 의해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통제할 운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과거 러시아 제국의 산업적 기반으로서 상징적·정서적 의미가 컸던 돈바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돈바스는 어떤 의미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돈바스를 잃는 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악몽’이자 ‘비극’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재앙을 넘어 군사적 재앙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돈바스는 2014년 내전 이후 우크라이나가 공들여 요새를 구축해온 핵심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만일 이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서쪽에 위치한 평원지대인 하르키우,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 이에 젤렌스키는 “만일 우리가 지금 돈바스를 내준다면 러시아의 다음 공격을 위한 길을 터주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전쟁연구소(ISW)는 “우크라이나는 지난 11년간 이 ‘요새 벨트’를 강화하고, 이들 도시 주변에 방산 인프라와 방어시설을 구축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다”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만일 이 요새가 뚫린다면 모스크바는 손쉽게 우크라이나 중심부로 진격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돈바스를 포기하는 건 곧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바스는 또한 우크라이나의 교통 요지이기도 하다. 수도 키이우와 동부 하르키우를 잇는 철도가 지나가며, 마리우폴로 가는 철도 역시 이곳을 통과한다. 따라서 만일 러시아가 돈바스를 점령하면 수도 키이우까지 프리패스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는 일부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돈바스에서의 고통이 종식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영토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긴급 구조대원인 예벤 트카초프는 “도네츠크를 포기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전쟁을 킬로미터가 아니라 인간의 목숨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답하겠다”고 말하면서 “생명이 영토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과연 영토를 포기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국가 영토를 공식적으로 다른 나라에 양도하려면 의회 승인과 국민 투표가 필요하다. 현재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자국 영토를 포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푸틴의 야망이 돈바스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푸틴은 공격을 시작했을 때 명확하게 어디까지 침략할지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일단 성공의 맛을 보면, 욕심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라고 꼬집었다. 또한 키이우에 거주하는 NGO 활동가인 카테리나 아브라멘코 역시 “영토 양보는 러시아의 침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를 넘어 다른 나라로의 침략까지 허용하는 ‘초록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