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의 ‘너여야만 해’ 한마디에 결심…사과 한 쪽으로 버티며 두 달 반 동안 15kg 뺐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폐위된 왕 단종과 그를 지키려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과 인간,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되짚는다. 박지훈이 연기한 단종은 역사 속에서 이미 비극으로 규정된 인물이지만 영화는 그를 ‘연약한 왕’이나 ‘희생자’라는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살아가고자 했던 의지를 따라간다. 박지훈 역시 단종을 하나의 상징으로 연기하기보다는 감정의 결을 따라 천천히 만들어 가고자 했다.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단종을 만들어 나가면 좋을지를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호흡이라든지, 점점 눈빛이 변해가는 과정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신경을 썼죠. 유배지로 오고 나서 마을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도 저런 꿈을 꾸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저렇게 궁 밖의 사람들은 돈독한데, 궁 안에서도 그럴 수 있었다면 나의 인생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단종이라는 왕을 한 가지 이미지로 각인시키기보다는 영화 속 단종을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박지훈은 자신의 강점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사보다 먼저 감정이 드러나는 눈빛, 상황에 스며드는 몰입 방식은 단종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하지만 그는 ‘눈빛 연기’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려 하진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대본과 상황 안으로 최대한 깊이 들어가는 데 집중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단종의 비극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기 위해 박지훈은 외형부터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작품 제안을 받았을 당시 휴가 기간을 보내며 체중이 늘어난 상태였고, 이 모습에 장항준 감독조차 “(살을 안 빼면) 이 작품이 내 유작이 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는 후문이다. 박지훈 역시 그 말을 듣고 “제가 감독님이어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라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때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놀던 휴가 기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그 시기의 저를 보시고 감독님도 ‘어? 내가 봤던 애의 이미지가 아닌데?’ 하셨을 거예요. 그래도 저를 믿어주신 감독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말 사과 한 쪽만 먹으며 다이어트를 했죠. 피폐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표현해내고 싶었어요. 두 달 반 동안 15kg 정도 뺐는데, 안 먹는 게 오래 가다 보니 식사 장면을 촬영할 때도 바로 게워 내게 되더라고요. 소리 지르는 신을 찍을 땐 몸에서 쓸 에너지가 없어서 현기증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그래서 중간중간 젤리 하나씩 먹어가며 그렇게 버텼죠.”
이처럼 몸과 정신을 깎아가며 열연으로 완성해 낸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박지훈은 업계가 주목하는 라이징 배우로서의 탄탄대로를 향해 또 한 발자국을 옮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그의 이름 앞에는 여전히 ‘워너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해가면서도 대중이 박지훈을 가장 먼저 떠올릴 때는 한 시대를 관통한 아이돌의 얼굴이 먼저 겹쳐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쑥스럽긴 해요(웃음). 선배님들 앞에서 애교 떠는 게 쉽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걸 요청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저를 기억해 주시고 좋아하시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그러니 거리낌 없이, 자신감 있게 하는 거죠(웃음). 이상하거나 안 내키거나 하지 않아요. 그냥 제가 보여드리면 다들 좋아해 주시니까요. 또 선배님들도 같이 막 해주시는데, 그런 것도 큰 것 같아요. 선배님들도 해주시니까 저 역시 자연스럽게, 예쁘게 애교를 떨게 되는 거죠(웃음). ”
무엇이든 수용하는 태도는 박지훈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 중 하나다. 아이돌 시절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그 시절을 완전히 떼어내야만 배우로 인정받는다는 낡은 공식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래서 ‘왕과 사는 남자’에서의 단종은 ‘아이돌 출신의 변신’이라는 수식어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호흡과 눈빛을 쌓아 올리며 스크린을 채워낸 박지훈은 이제 막 배우로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가 뭐든지 감싸 안으며 ‘도전하는 배우’로 남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일일 드라마 시청자 분들 중에 나쁜 악역에게 과몰입하셔서 실제로 연기한 배우를 보고도 막 화내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저를 보시고도 ‘아유 안됐다’ 이런 말 해주시는 걸 들으면 진짜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아이고, 단종 아이가. 아이고 불쌍타’ 하시면서(웃음). 저한테 있어서는 진짜 최고의 칭찬이 될 거예요. 사실 저는 도전하는 걸 정말 좋아해서 어떤 작품이든 ‘이건 뭐가 있으니까 해야지’라고 결정하기 보단 그냥 ‘아무거나 다 해봐야지’라는 게 더 크거든요. 작품의 흥행을 떠나서, 저만의 욕심이긴 하지만 무엇이든지 정말 다 도전해 보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