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억 배상책임 사라져…100억 원대 소송 비용 환수도 가능

이번 판결의 핵심은 2023년 상설중재재판소(PCA)가 내린 배상 명령의 법리적 근거를 정면으로 뒤집은 데 있다. 당초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에 배상금 5358만 달러와 지연이자를 포함해 약 1300억 원 규모의 지급을 명령했으나, 영국 법원은 중재판정부가 관할권을 잘못 해석했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한-미 FTA상 투자자 보호 의무 위반으로 직결되는 관할권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정부는 2023년 7월 영국 중재법 제67조에 근거해 관할권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취소소송에 착수했다. 한-미 FTA 제11장 투자자 보호 규정이 적용되려면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여야 하는데, 국민연금공단의 찬성 투표를 정부의 직접적인 조치로 보기 어렵다는 법리가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승소로 배상금 지급 의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 엘리엇으로부터 약 100억 원대에 달하는 소송 비용을 환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영국 법원의 이번 결정은 사실상 최종적인 효력을 가지며, 엘리엇 측의 추가적인 불복 절차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는 판결문 세부 내용을 정밀 분석하는 한편, 승소에 따른 후속 조치로 소송 비용 환수 절차에 즉시 착수할 방침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판결이 메이슨 캐피탈 등 유사한 성격의 다른 국제 분쟁 사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가의 정책 결정이나 공적 기구의 의사결정을 국제 중재의 잣대로 과도하게 평가하는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철준 기자 cj5121@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