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로펌부터 개인 사무소까지 ‘필수 구독’…가짜 판례 생성 ‘환각 현상’·법률 서비스 품질 저하 우려도
50대 초반의 대형 로펌 대표변호사 B 씨도 최근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근무 시간’이 줄어든 것을 느끼고 있다. 판례를 일일이 찾지 않아도, 사건 내용과 유사한 판례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사해 문장을 조금만 다듬으면 금방 정리돼 시대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변호사 4만 명 시대,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린 서초동 변호사들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법률 서비스의 질을 판결문 검색과 법·판례 암기로 증명했던 베테랑 변호사들조차 이제는 AI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해졌다. AI는 로펌 규모나 변호사의 연차와 관계없이 생존을 위한 ‘필수재’가 됐다.

현재 서초동에서 가장 사용률이 높은 서비스는 슈퍼로이어와 엘박스다. 대형 로펌들은 이미 이 서비스들을 소속 변호사들에게 ‘기본 인프라’처럼 제공하고 있다.
슈퍼로이어는 2024년 7월 출시 이후 약 2만여 명이 가입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유료 서비스인데도 국내 등록 변호사의 절반이 사용할 정도다. 법률 리서치, 법률서면 초안 작성, 사건 분석 등 변호사 업무 전반에서 선호도가 높다.
법조인에게 ‘필수’ 업무인 판례 검색은 국내 최대 판례 데이터베이스(DB)를 보유한 엘박스를 활용한다. 리서치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유사 판결문을 즉각 인용해야 하는 실무 변호사들에게는 연차를 불문하고 대체 불가능한 도구가 되고 있다.
변호사들의 업무 흐름도 바뀌었다. AI 프로그램 등장 전에는 포털사이트를 통한 유사 사건 검색, 종합법률정보 사이트 검색, 유사 사건 판례 확인 등을 거쳐 확보한 모든 자료를 일일이 읽어본 뒤 이 가운데 필요한 내용만 추려 서면 작성 등 업무를 처리했다. 이제는 슈퍼로이어에 질문해 받은 답변을 토대로 엘박스에서 유사 사건 판례를 확인하고, 여기서 필요한 문장과 내용을 가져와 제미나이 등 범용 AI로 서면 초안을 작성한다. 이후 사실관계를 확인하며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과거에는 적게는 5~6시간, 많게는 며칠이 걸리던 일을 이제는 AI 서비스를 활용해 1시간 안팎에 마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제미나이, 챗GPT, 클로드 같은 범용 AI까지 포함해 새로운 대응 전략을 찾거나 해외 사례 등을 추가한다. ‘변호사 업무 루틴’에 AI가 빠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게 모든 변호사들의 설명이다.
앞의 A 변호사는 “상담을 토대로 대략의 대응 전략을 세우면 이를 뒷받침할 판례는 엘박스를 통해 찾고, 슈퍼로이어를 통해 법률 검색 및 초안을 작성해 마지막에는 제미나이를 활용해 문장을 가다듬는다”며 “일정 규모 이상의 로펌에서 엘박스나 슈퍼로이어는 기본적으로 소속 변호사에게 제공하다 보니 제미나이나 챗GPT를 구독해 추가 활용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변호사 10명 규모의 소형 로펌을 운영 중인 40대 변호사 C 씨는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모니터 두 개 중 하나에 AI 프로그램을 열어두는 게 업무 시작의 루틴”이라며 “문서 작성 AI도 구매해 PPT 작성 등에 활용하고 있다. AI를 잘 활용하면 변호사 2~3명을 대체할 정도로 업무 효율성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변호사 시장 축소 걱정도
AI 활용 증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가장 큰 우려는 AI가 존재하지 않는 가짜 판례를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이다. 실제로 제미나이나 챗GPT를 쓰다 보면 없는 판례를 지어내기도 한다.
문제는 현재 법조계에는 AI로 인한 실수나 허위 정보 제출에 대한 구체적인 ‘직무 윤리 가이드라인’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한 지방법원 형사 사건에서 재판부는 변호사가 제출한 판결 5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 이에 출처를 묻자 해당 변호사가 “AI를 활용했다”고 한 경우도 있다.
법률 서비스 품질 저하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AI를 활용해 서면을 대체하는 경우 변호사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만 의뢰인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한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변호사들의 서면을 보다 보면 AI 프로그램에 과도하게 의존해 ‘변호사만의 생각’이 제대로 읽히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며 “AI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AI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그 피해는 결국 법률 서비스를 구매한 의뢰인이 받는다”고 지적했다.

차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상담해주다 보면 상담료만 내고 나머지 서면 작업이나 구체적인 소송은 직접 진행하는 이들도 있다”며 “만일 의뢰했다면 선임료 1000만 원에 성공보수까지 수천만 원이 들었겠지만, 이제는 상담료 20만~30만 원만 시간당 비용으로 내고 서류 작업은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앞으로는 의뢰인들이 AI 법률 프로그램을 직접 구독해 대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앞선 B 변호사 역시 “AI 프로그램이 진화할수록 변호사들의 먹고 사는 문제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