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송금 불발되자 “다시 처리해”…직원 동원 거액 인출 ‘장 회장’ 검찰 송치…안톤 “올레크 칸 범죄은닉자금” 주장
[편집자주]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고려인 사업가 '장 회장'과 수감 중인 옛 동업자 '박 안톤'(가명). 이들은 한때 식품사업을 함께한 평범한 동업자로 보였다. 이후 두 사람 관계는 틀어져 법적 소송전을 벌였다. 그런데 두 사람 관계를 되짚어가면 △러시아 마피아 유착 △총기 은닉 △범죄 피의자 밀항 △자금세탁 △현직 경찰관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 등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고 믿기 힘든 의혹과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일요신문은 안톤의 진술과 통화 녹취 및 휴대전화 메시지, 금융 관련 자료, 사정당국 작성 문건 등을 토대로 ‘장 회장-박 안톤’ 두 사람 주변에서 2020년부터 벌어진 사건과 의혹 전말을 서울과 부산, 김해 등지에서 9개월 동안 추적했다.
[연재 순서][일요신문] 2021년 6월 초, '장 회장' 측이 진행하던 해외송금 한 건이 은행 문턱에서 막혔다. 액수는 수십만 달러 규모였다.
[마피아의 심부름꾼 ①] 총기와 밀항, 그리고 돈세탁
[마피아의 심부름꾼 ②] 2020년 고려인 난투극, 사라진 한 사람
[마피아의 심부름꾼 ③] "술 상자에 돈 넣어 경찰에 바쳤다"
[마피아의 심부름꾼 ④] 난투극 도망자 밀항, 경찰관은 알고 있었다…녹취 속 그날 대화
[마피아의 심부름꾼 ⑤] 은행서 막힌 수십만 달러, 주인은 누구?
"결제가 통과되지 않았어. 다시 처리해."
장 회장의 지시에 박 안톤(가명)은 다시 송금 절차를 밟았다. 은행이 요구한 서류를 준비하고, 송금이 처리됐는지 확인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해외송금 문제를 둘러싼 대화가 반복됐다. '500,000_USD_SALES_INVOICE.pdf' 등 각종 송금·거래 관련 서류도 수시로 주고받았다. PDF뿐 아니라 내용을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DOC·DOCX 형태의 송장 파일도 함께 오갔다.
송장에 적힌 액수는 적지 않았다. 50만 달러(약 6억 8000만 원), 60만 달러(약 8억 1400만 원) 등 거액이었다.
두 사람의 메시지 대화 내용을 보면 실제 물품 거래보다 '돈을 은행에서 통과시키는 일'에 신경 쓰는 모습이 반복된다. 물품 수량이나 선적 일정, 통관 여부보다는 송금 승인 여부와 서류 보완 문제를 확인하는 대화가 훨씬 두드러졌다.
은행 측이 추가로 서류와 항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잦았다. 구체적인 지급 목적, 상품 종류와 원산지, 서비스 제공자의 주소와 소재지, 제재 대상 국가와 거래가 연관됐는지 여부 등을 소명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또 터키(튀르키예)야?"
"파나마."
"이스탄불로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거래 상대방의 소재지마저 뒤섞였다. 수십만 달러짜리 송장을 다루면서 거래 상대가 튀르키예인지 파나마인지, 왜 이스탄불이 적혀 있는지를 서로가 알지 못했다.
안톤은 일요신문에 이 작업의 실체가 '자금세탁'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 물품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서류를 꾸민 뒤 해외로 돈을 옮겼다는 설명이다.
실제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뉴욕지점이 이들의 송금을 자금세탁방지(AML) 등 금융 규정에 따라 심사한 뒤 처리를 중단한 사례도 있었다. 장 회장과 안톤이 "돈이 통과되지 않았다" "다시 처리하라"며 끊임없이 송금을 시도했음에도 해외 금융기관이 거래를 멈춰 세운 것이다.

수상한 자금 흐름은 해외로 돈을 보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에서 달러를 원화로 바꿔 현금으로 입금한 흔적도 확인됐다.
일요신문이 확보한 하나은행 통장에는 2020년 3월 27일 현금 8107만 원이 입금된 내역이 찍혀 있다. 함께 전달된 계산 자료에는 '1210×67,000=81,070,000'이라고 적혀 있다. 미화 6만 7000달러를 달러당 1210원으로 계산한 액수다.
안톤은 이 거래에 대해 러시아 수산회사 '아마람바(Амарамба)'를 통해 달러를 환전한 뒤 장 회장 측 계좌에 입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마람바는 러시아 수산회사다. 외견상 한국이나 장 회장과 안톤이 함께 경영한 경남 김해시 식품회사 R 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러시아 회사의 달러가 국내에서 원화 현금으로 바뀌어 장 회장 측 계좌로 들어간 셈이다.
러시아 현지 보도에 따르면, 2020년 5월 아마람바 소유 선박 '에코파시픽'은 허용된 어획량을 초과해 살아있는 게 30톤(t) 이상을 잡은 혐의로 현지 연방보안국(FSB) 국경수비대에 적발됐다. 러시아 당국이 추산한 피해액은 8700만 루블(약 14억 원) 이상이었다.

장 회장 측 자금세탁 작업에 직접 동원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안톤뿐만이 아니다.
일요신문은 지난 9월 식품회사 R 사 전 직원인 고려인 '로마'(익명)를 직접 만났다.
로마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R 사에서 근무했다. 그는 회계나 자금 업무를 맡은 직원이 아니었다. 소시지 관련 현장 업무와 배송을 맡았다.
그런 로마에게 어느 날 장 회장 측에서 연락이 왔다. '여권을 꼭 챙겨' 자신에게 오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장 회장 사무실에 찾아갔더니 로마 자신의 이름으로 위임장이 준비돼 있었다고 한다. 위임 대상은 '스타라인'과 '오션드림'이라는 회사였다. 로마는 두 회사 어느 곳에서도 일한 적 없고, 존재마저 몰랐던 회사였다.
로마는 장 회장 지시에 따라 2020년 부산 하나은행을 찾아갔다. R 사 회계 담당자 최 아무개 씨, 장 회장의 보조인 허 아무개 씨도 동행했다.
은행에서 잠시 대기하자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 한국어가 서투른 로마는 영문도 모른 채 서류 두세 군데에 서명했다.
그러자 돈이 나왔다. 무려 '100만 달러'(약 14억 원)였다.
로마는 그 현금을 차량에 실어 장 회장 측에 가져다줬다고 증언했다.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왜 자신이 대신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장 회장이 제일 위 사람이었잖아요. 가라고 하면 그냥 알겠다고 했죠. 그냥 가서 사인하고 돈만 받아오면 되는 일이라고 했어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는 2022년 1월 24일 같은 부산 하나은행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약 80만 달러였다. 첫 방문 때처럼 회계 담당자가 동행했다. 그 외 김 아무개 씨와 러시아계 한 인물도 같이 갔다. 창구 직원도 첫 방문 때와 같은 여성이었다.
이번에도 로마는 서류에 서명한 뒤 돈을 받아 차량에 싣고 장 회장 측에 전달했다.
두 차례를 합하면 약 180만 달러(약 24억 원)다.
이 증언이 눈에 띄는 이유는 로마의 역할 때문이다.
안톤은 장 회장과 직접 사업하며 해외송금과 송장 작업에 관여했던 내부자다. 이에 비해 로마는 소시지와 배송 업무를 하던 일반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근무하지도 않는 회사 명의 위임장을 들고 여권으로 신원을 확인한 뒤, 두 차례 거액을 찾아 장 회장 측에 전달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안톤은 2024년 10월 경남경찰청에 장 회장의 자금세탁과 허위문서 작성 의혹을 제보했다. 장 회장 및 회사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메시지, 송장과 해외송금 관련 서류 등 자신이 갖고 있던 자료도 함께 제출했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약 1년이 지난 뒤에는 이미 냈던 자료를 다시 정리해 제출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안톤은 "사건을 제보할 때 장 회장과 주고받은 메시지와 번역 내용을 모두 제출했는데 또 다시 내야 하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경남경찰청은 안톤의 최초 제보로부터 약 2년 만인 지난 9월 중순 장 회장을 검찰에 송치했다.
적용 혐의 가운데 하나는 외국환거래법 위반이다. 이 밖에 또 다른 혐의 한 건도 함께 적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경남경찰청 관계자는 일요신문에 "사건을 창원지검에 최근 송치했다"며 "추가로 적용된 혐의가 무엇인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안톤은 장 회장이 움직인 자금의 실체가 러시아 올레크 칸과 관련된 범죄은닉자금이라고 주장한다.
'올레크 칸'. 러시아 극동 수산업계에서 '킹크랩 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러시아 사법당국은 올레크 칸을 살인교사와 밀수 등 혐의로 기소했다가, 그가 해외로 도피하자 국제수배 대상에 올렸다. 우리나라 사정당국이 작성한 문건에는 장 회장이 올레크 칸이 지명한 '국내 러시아계 조직의 수괴'로 파악됐다는 내용도 담겼다.
안톤 주장대로라면, 장 회장이 여러 해외 법인과 다른 사람 명의의 회사, 위임장 등을 이용해 올레크 칸과 관련된 자금을 국내외로 옮기는 역할을 한 셈이다.
로마의 경우 자신이 두 차례 찾아온 약 180만 달러의 실제 주인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에도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로마는 "2020년 무렵 김해 R 사 공장에서 올레크 칸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장 회장 지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액의 돈을 찾아오던 시기와 비슷한 때, 러시아에서 도피 중이던 올레크 칸을 장 회장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목격했다는 뜻이다.
장 회장과 안톤 사이에서는 △수십만 달러짜리 송장과 수정 가능한 인보이스 △파나마 법인 관련 자료가 반복해서 오갔다. △일부 송금은 해외 금융기관 심사에서 중단됐고 △러시아 수산회사 자금으로 설명되는 달러가 국내에서 원화로 환전돼 장 회장 측 계좌로 들어갔다. △R 사의 일반 직원이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회사의 위임장을 들고 두 차례에 걸쳐 약 180만 달러를 찾아 장 회장 측에 전달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경남경찰청은 장 회장에게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남은 것은 돈의 실체와 성격이다. 수십만 달러에서 많게는 100만 달러씩 움직인 돈이 어디에서 시작돼 누구를 거쳐 어디로 향했는지, 그리고 그 흐름의 끝에 정말 올레크 칸이 있었는지. 사건은 창원지방검찰청으로 넘어갔다.
주현웅·김지영·남경식·최희주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