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장 상납 요구로 시작된 64명 집단 충돌…러시아 마피아 배후 지목 속 장 회장은 “금시초문”
[편집자주]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고려인 사업가 '장 회장'과 수감 중인 옛 동업자 '박 안톤'(가명). 이들은 한때 식품사업을 함께한 평범한 동업자로 보였다. 이후 두 사람 관계는 틀어져 법적 소송전을 벌였다. 그런데 두 사람 관계를 되짚어가면 △ 러시아 마피아 유착 △ 총기 은닉 △ 범죄 피의자 밀항 △ 자금세탁 △ 현직 경찰관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 등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고 믿기 힘든 의혹과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일요신문은 안톤의 진술과 통화 녹취 및 휴대전화 메시지, 금융 관련 자료, 사정당국 작성 문건 등을 토대로 ‘장 회장-박 안톤’ 두 사람 주변에서 2020년부터 벌어진 사건과 의혹 전말을 서울과 부산, 김해 등지에서 9개월 동안 추적했다.
[연재 순서][일요신문] “안톤, 여기로 와!”
[마피아의 심부름꾼 ①] 총기와 밀항, 그리고 돈세탁
[마피아의 심부름꾼 ②] 2020년 고려인 난투극, 사라진 한 사람
경남 김해시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고려인 집단 난투극’이 일단락되고, 불과 몇 시간 지난 2020년 6월 21일 새벽. 박 안톤(가명)은 장 회장과 마주했다.
“이 XX 같은 X이 쏘라니까 쏘지도 못하고 말이야.”
장 회장이 욕설을 쏟아냈다. 그의 손엔 실탄이 든 권총이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 권총이라니. 안톤의 고백은 이제 시작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날 밤 김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포커 치려면 세금 내라”
시간을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으로 돌려보자.
2020년 6월 13일 오후 6시 10분. 고려인의 수도권 폭력 조직인 이른바 ‘안산파’ 무리는 경남 김해의 한 당구장을 찾아갔다. 당구장 안쪽에는 사설 포커 도박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팔다리 잘리고 싶지 않으면 돈 내놔!”
안산파는 당구장 주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매달 세금 명목의 상납금을 내라고, 따르지 않으면 ‘팔과 다리를 자르겠다’는 협박도 뒤따랐다.
다음날 새벽, 안산파 조직원들은 차량 4대를 몰고 경남 창녕으로 향했다. 이들이 노린 건 또 다른 사설 도박장. 방 안에 있던 피해자는 급습한 조직원 5명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조직원 20여 명이 서 있었다.
“뻔뻔한 XX. 한국에서 포커 치려면 우리한테 세금을 내야지. 매달 수익금 30%야.”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안산파 간부의 섬뜩한 경고가 이어졌다.
“너…잘 생각해라.”
곧장 사장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안산파 조직원들이 남자를 에워싸고 머리와 몸통을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했다. 일부 조직원은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뒤졌다.
피해자는 두들겨 맞다 앞니 3개가 빠졌다. 그래도 돈은 건네지 않았다. 돈을 내는 순간, 끊을 수 없는 상납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일주일 뒤인 6월 20일, 안산파는 조직원들을 끌어 모았다. 안산은 물론 인천, 충남 아산, 경북 경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인원을 결집했다.
안산파의 결집 소식은 부산·경남의 지역 세력에도 들어갔다. 고려인 ‘김해 동상동파’(이후 ‘남부파’)가 ‘안산파와의 전쟁’ 채비에 돌입했다. 안산파가 손댄 도박장들이 실은 남부파에 매달 상납금을 내던 곳이었다.

어두운 밤, 주차장으로 차량 9대가 줄지어 들어섰다. 먼저 자리를 잡은 쪽은 남부파. 차 문이 열리자 야구방망이와 철근, 각목, 회칼을 든 조직원들이 잇달아 내렸다. 남부파 조직원들은 모두 같은 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싸우는 도중에도 '한 식구'임을 구분하기 위한 표시였다.
얼마 뒤 안산파 조직원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이들 손에도 야구방망이와 칼 등이 들려 있었다.
안산파 37명과 남부파 27명, 총 64명. 남부파가 먼저 움직였다. 차량으로 주차장 입구를 막은 뒤 철근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안산파 쪽으로 달려들었다.
안산파는 물러서지 않았다.
“싸워!”
안산파 한 간부가 남부파 조직원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며 외쳤다.
“제대로 싸우란 말이야!”
각목과 야구방망이를 든 양측 조직원들이 주차장 곳곳으로 흩어지며 눈 깜짝할 사이 뒤엉켰다. 마구 휘둘러진 흉기에 승용차 보닛과 문짝들이 잇달아 내리찍혔다. 공사장 주변에 산재해 있던 벽돌과 화분도 무기가 됐다.
누군가는 달아났고, 누군가는 쫓았다. 차들이 뒤엉킨 주차장 곳곳에서 쇳소리와 고성이 터졌다.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승용차 조수석 쪽으로도 온갖 흉기가 날아들었다.
60여 명이 뒤엉킨 난투극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현장 주변을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하면서 일단락됐다.
사흘 뒤, 김해 도심 한복판에서 고려인 수십 명이 난투극을 벌였다는 사실이 전국에 보도됐다. 경남경찰청과 김해중부경찰서는 100명 규모의 합동 전담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착수해 양측 조직원 총 64명 가운데 63명을 붙잡았다.
검거된 조직원들은 우발적 싸움이었다고 주장했다. 단순 시비로 인한 충돌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안산파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 ‘R파’의 하위조직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간부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식 연락망을 갖추고 있었다. 간부가 지시를 내리면 조직원들이 주변 조직원들에 다시 연락해 모이는 식이다. 난투극 당일 안산과 인천, 충남 아산, 경북 경주 등에 흩어져 있던 조직원들을 김해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구조에서 비롯됐다.
2020년 11월 26일 창원지법 형사7단독 박규도 판사는 특수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산파 핵심 간부 2명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 다른 조직원들에게는 징역 8개월에서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난투극 당일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망친 단 한 사람, 즉 경찰이 유일하게 검거에 실패한 인물 ‘밀레닌 알렉산드르’.
별칭은 ‘사샤’. 남부파의 우두머리다.
김해 난투극 사건으로 열린 9건의 재판에서 사샤는 김해 지역 세력의 간부급으로 지목됐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난투극 전 조직원을 모은 것도, 같은 색 장갑을 준비한 것도 모두 그였다. 하지만 사샤는 이 사건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처벌할 수 없었다.
안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위스키 상자 속 권총과 고무보트
2020년 6월 20일 사건 발생 4시간쯤 뒤인 다음날 새벽 2시 김해. 안톤은 장 회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회사로 와!”
당장 오라는 말에 급히 회사로 간 안톤은 그곳에서 사샤를 봤다고 했다. 장 회장도 있었다. 안톤은 무슨 상황인지 영문도 모른 채 장 회장이 내놓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자 장 회장은 또 다른 심부름을 시켰다.
“부산 텍사스에 가서 사람 2명을 데려와.”
심부름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땐 새벽 5시쯤이었다. 장 회장은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 그런데 장 회장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이 XX 같은 X이 쏘라니까 쏘지도 못하고 말이야.”
사샤를 겨냥하는 듯한 말을 하던 장 회장 손엔 러시아제 마카로프 권총이 있었다.
“안톤, 네가 갖고 있어.”
장 회장은 “실탄이 들었다”며 권총을 검은 비닐로 쌌다. 이윽고 프랑스산 ‘루이스’ 양주 상자를 가져와 권총을 비닐째 넣은 뒤 안톤에게 건넸다.
“숨겨둬.”
안톤은 그 상자를 자신의 차량 트렁크 스페어타이어 공간에 숨겼다.

안톤은 난투극 직후뿐 아니라, 이틀 지난 6월 23일에도 총기 한 자루를 더 챙겼다. 사샤의 집 부엌 싱크대 아래 검은 비닐과 테이프로 싸인 권총이었다. 이 총도 첫 번째 총 옆, 차량 스페어타이어 공간에 넣어 보관했다. 역시 장 회장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쯤 뒤에는 사샤의 동거인으로부터 탄약을 더 받았다. 그리고 다시 이틀쯤 뒤 장 회장 지시로 총기와 탄약을 박○○(장 회장 회사 직원)에게 넘겼다. 안톤의 김해 집 주차장 인근에서, 갈색 종이 쇼핑백에 권총 2자루와 탄약을 담은 상태로.
이는 안톤이 지난 4월 경찰에 제출한 러시아어 자필 진술서에도 담긴 내용이다.

“장 회장은 내게 모든 것을 박○○(장 회장 회사 직원)에게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박○○이 우리 집 주차장으로 찾아왔고, 나는 그에게 실탄용 권총 두 자루와 탄약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건넸습니다. 그 뒤 그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내가 박○○에게 권총을 어디에 뒀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내의 여자형제 집에 숨겼다고 말했습니다.안톤은 장 회장이 경남 거제에 사샤의 은신처를 마련해줬다고도 증언한다.
본 진술서는 본인이 직접 자필로 작성함.
박 안톤(가명)
서명
2026.04.02
“그날(2020년 6월 20일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다음 날) 사샤에게 제 차와 휴대전화 유심을 줬습니다. 사샤는 거제에 있다가 밀항해 한국을 떠났어요.”
밀항에는 배가 필수다. 안톤은 직접 부산에서 고무보트를 구입해 수영만 요트장에 가져다놨다. 사샤가 몰래 한국을 뜰 수 있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안톤을 불렀다. 사샤의 행방과 그가 안톤 명의의 차량과 휴대전화 유심을 쓰게 된 경위 등에 대해 물었지만 안톤은 아무 진술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경찰은 집단 난투극에 가담한 이들이 러시아 마피아와 연계돼 있다는 첩보를 확보해 계좌를 추적하는 등 수사를 확대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단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김해중부경찰서 관계자의 말이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러시아)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복당할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고 얘길 하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국내에 있는지 본국에서 지시를 하는 건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된다.”
#안톤 vs 장 회장 식품회사 놓고 소송전

일요신문은 장 회장 본인과 핵심 측근들에게 지난 7월부터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다.
장 회장은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도 어째서인지 한국어가 서툴다. 안톤과는 늘 러시아어로 대화했고, 재판 등 필요한 자리엔 통역사를 대동했다.
지난 7월 말 일요신문 기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장 회장은 러시아어로 몇 마디를 한 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직원에게 전화를 넘겼다. 해당 직원은 “김 아무개 본부장에게 (전화를 건 일요신문 기자에게) 연락하라고 하겠다”고만 했다.
연락이 닿은 김 본부장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만 러시아 마피아 유착, 총기 은닉, 밀항, 자금세탁, 경찰관 금품 전달 의혹 등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라며 “우리는 그 사람(안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후 장 회장과 김 본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일요신문은 보름쯤 뒤 장 회장이 있는 김해 식품회사로도 직접 찾아갔지만 마찬가지였다. 한 직원이 “(장 회장과는) 사전 약속 없이는 만날 수 없다”고만 했다.
최희주·주현웅·김지영·남경식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