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여성 강제 퇴거 사건이 도화선…관광 명소 에워싸고 주거권 천막 농성 이어져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지난 17일엔 리스본의 대표 관광명소 호시우 광장에도 천막촌이 들어섰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페드루 4세 동상 주변으로 시위대가 텐트를 설치했다. 시민들은 도심 한복판에서 밤을 지새우며 집세 인하를 주장했다.
#“월급 전부가 월세로”…독립도 어려운 스페인 청년들

마드리드 주거권 시위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87세 여성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의 강제 퇴거 사건이었다. 지난 9월 23일, 그는 70년 넘게 살아온 집에서 끝내 쫓겨났다. 2018년 해당 주택을 사들인 부동산 업체가 기존 임대차계약 만료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탓이었다. 업체가 새 계약 조건으로 요구한 월세는 1650유로(약 246만 원). 기존에 내던 약 500유로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거동조차 어려웠던 그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는 장면은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사흘 뒤인 9월 26일 시민들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아바스칼은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합의했지만 끝내 귀가하지 못하고 지난 10월 7일 병원에서 숨졌다. 광장의 상징인 ‘곰과 마드로뇨 나무 동상’ 아래에는 아바스칼을 추모하는 촛불과 꽃송이가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21일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인근에서 만난 호텔 매니저 비앙카(32)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관광숙박업이 임대료 상승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그는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시설이 임대료 상승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은 맞다”면서도 “마드리드는 관광이 중요한 도시인 만큼 관광객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광산업에 의존하면서도 그에 따른 주거비 부담을 걱정해야 하는 딜레마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앙카는 “최근 1~2년 사이 주거비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월급 전부를 월세로 써야 할 정도로 집세가 비싸졌다”고 말했다. 이어 “집세가 체감상 2~3배는 넘게 오른 것 같다”며 “혼자 살던 사람들은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여러 명이 집을 나눠 쓰는 셰어하우스로 들어가거나 연인과 동거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마드리드의 천막 농성을 본뜬 시위는 바르셀로나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9월 29일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에 청년들이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현장을 취재한 스페인 EFE통신에 따르면 농성에 참가한 후안과 이레네는 “방 하나를 구하는 데 월급의 절반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후안이 바르셀로나에서 알아본 방들은 월 400~600유로에 달했다. 아파트 전체가 아닌 방 한 칸의 가격이다. 대학에 다니며 시간제로 일하는 이레네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산다.

#“월세 낼 돈 없으면 텐트 치자”…포르투갈로 번진 시위
주거비 폭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로 확산했다. 지난 10월 15일, 포르투 도심 곳곳에는 텐트 그림이 그려진 벽보가 눈에 띄었다. 현지 주거권 단체가 내건 구호는 “월세를 낼 수 없다고? 그렇다면 텐트를 쳐라!(Não consegues pagar a renda? Então monta a tua tenda!)”였다.
텐트는 이미 광장에 들어서 있었다. 앞서 10일 포르투 동 주앙 1세 광장에는 40여 개의 텐트가 설치됐다. 농성에 나선 시민들은 청소와 음식 준비, 물품 관리 등으로 역할을 나눠 광장을 지켰다. 포르투갈 현지 방송 SIC와 인터뷰한 참가자는 농성 초기 ‘스페인처럼 해보자’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설명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시 당국이 위생 문제를 이유로 텐트를 철거하지 못하도록 빗자루를 들고 광장 바닥을 청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성이 길어지면서 경찰과의 마찰도 불거졌다. 15일 새벽 3시쯤 공공안전경찰(PSP)이 동 주앙 1세 광장의 천막 농성장에 진입했다. 주최 측은 이 과정에서 참가자 39명이 다쳤다고 주장했다. 경찰도 소속 경찰관 1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경찰 진압에 반발한 시민들은 이날 저녁 다시 거리로 나왔다.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시위대의 거센 함성이 기자의 숙소까지 생생히 울려 퍼질 정도였다.
2500여 명의 시위대는 포르투 시청 앞으로 행진하며 경찰의 진압을 규탄했다. 참가자들은 “포르투는 팔지 않는다(O Porto não se vende)”라는 구호를 외쳤다. 관광산업과 부동산 투기로 도심 주택이 돈벌이 수단으로 변하고, 기존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는 임대료 상한제 도입과 공공주택 확충, 강제 퇴거 중단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의 주거비도 매년 상승하는 추세다. 이데알리스타가 집계한 올해 9월 리스본의 임대주택 매물 호가는 ㎡당 월 25.1유로로 전년 대비 8.8% 올랐다.
그러나 포르투갈 정부는 오히려 임대인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신규 임대차계약의 임대료 제한을 없애고 강제 퇴거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임대시장에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해당 법안은 지난 9월 30일 의회 1차 심의를 통과했지만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 시위대는 세입자 보호가 약화될 것이라며 법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주택 대책 부결에 의회 해산까지…정치권 뒤흔든 주거난
스페인에서는 주거난을 둘러싼 갈등이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으로 이어졌다. 10월 2일 스페인 하원은 정부가 추진한 주택 관련 긴급법령 2건을 부결했다. 주말 동안에도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결국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5일 하원과 상원을 해산했다. 당초 2027년 8월로 예정됐던 총선도 오는 11월 29일로 앞당겼다.
산체스 정부는 의회 해산 다음 날인 6일 주택 관련 긴급법령 2건을 다시 승인했다. 총 21개 대책에는 취약계층 강제 퇴거 제한과 임대차계약 보호, 관광용 단기임대 규제 등이 포함됐다. 정부는 주택을 투기 대상이 아닌 주거 공간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보수 야당들은 임대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과도하다며 반발했다.
다만 정부가 다시 추진한 주택 대책의 운명도 아직 불투명하다. 의회가 해산된 만큼 법령의 최종 추인 여부는 하원 상임대표단이 결정해야 한다. 표결은 오는 11월 12일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조합과 주거권시민단체들도 하루 앞선 11일 주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총파업을 예고한 상황이다.
스페인·포르투갈=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