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주자니 아깝고 지키자니 왕부담
▲ 박삼구 회장과 대우건설 CI 합성. | ||
“작은 것을 지키려다 큰 것을 잃었다.”
지난 6월 1일 금호아시아나와의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한 후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가 한 말이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올해 초부터 금호 측에 유동성 해소를 위한 자구책 마련을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고 한다. 특히 금호의 알짜배기 계열사 중 하나로 꼽히는 대한통운 매각의 필요성을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물류사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금호는 대한통운 사수에 나섰고 여기에 불만을 가지게 된 채권단이 대우건설을 그 대안으로 모색하게 됐다는 것이다.
10대 그룹으로는 유일하게 금호가 구조조정 대상에 오르게 된 것은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 17개 투자자들과 맺은 풋백옵션 조항 때문이다. 당시 금호는 인수대금 6조 4000억 원가량 중 3조 5200억 원을 투자자들로부터 조달하면서 2009년 말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 1500원을 밑돌 경우 그 차액을 보전해준다는, 풋백옵션을 제시했다.
6월 3일 종가를 기준으로 대우건설 주가는 1만 3050원을 기록했다. 유진투자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올해 하반기 역시 주가 전망이 불투명하다. 상당수 전문가들이 대우건설 주식의 경우 1만 5000원을 넘기 힘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대우건설 주가를 최대 1만 5000원으로 잡는다고 해도 금호는 2조 50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호가 지난해 유동성 논란에 시달렸던 것도 이 풋백옵션 조항으로 인한 자금경색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금호는 기업설명회 등을 개최하고 금호생명 매각 계획을 밝히는 등 진화에 나섰다. 금호 관계자들은 “풋백옵션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자금 마련에 문제없다”고 자신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금호의 유동성 위기설은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금호가 밝혔던 자금 확보 방안은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난항에 부딪혔다. 풋백옵션 기한 연장도 실패했다. 여기에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가 1조 5000억 원에 달한다. 가진 돈은 적은데 갚아야 할 돈만 4조 원이 넘자 유동성 논란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지난 2월경 산업은행과 금융당국이 금호에 대한 구조조정 논의를 시작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금호가 큰소리를 치고는 있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자금 마련에 나서지 않으면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우건설 대한통운 등 M&A를 통해 인수한 핵심계열사 매각이 그 중 하나였다”라고 귀띔했다.
금호는 다시 불끄기에 나섰다. 박삼구 회장은 민유성 산업은행장을 만나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산업은행과 금호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합의를 이뤘다고 한다. 금호의 한 관계자는 “사실 내부적으로 그렇게 심각한 사안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추가 자금 확보 계획을 산업은행에 전달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의 산업은행 관계자도 “기회를 좀 더 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대표적인 호남기업이라는 상징성도 고려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러한 양측의 암묵적인 합의는 지난 4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도 옥석을 가려서 빨리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있어 정치색을 배제하고 지역 연고 같은 정치적 요인이 절대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사실상 깨져버렸다. 산업은행이 금호에 대해 강경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 이후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기업 구조조정이 잘못될 경우 해당 주채권은행장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고 김종창 금융감독원장도 “대우그룹도 미리 준비했다면 그룹이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운 기업부터 먼저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등 잇달아 과감한 기업 구조조정을 주문하면서 산업은행 역시 대우건설 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일단 금호는 남은 2개월 동안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내 대우건설을 지킨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이미 몇몇 투자자들과는 합의를 마치고 세부사항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 안팎에서는 한 미국계 사모펀드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지분 38.74%를 보유한 서울고속버스터미널도 매물로 내놨고 지지부진한 금호생명 매각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금호 측은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은행이 우리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와 금융권 등에서는 ‘결국 금호가 대우건설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대우건설에 투자하기엔 금호가 안고 있는 풋백옵션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설령 금호가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기존 투자자들보다 더 많은 프리미엄을 줘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금호가 산업은행이 아닌 또 다른 사모펀드에 더 좋은 조건으로 대우건설을 넘길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금호가 인수 3년여 만에 대우건설을 팔면 건설과 물류를 그룹의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던 박삼구 회장의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물론 산업은행이 되팔 경우 우선매수권을 금호에 줄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 벌써부터 한 대기업이 대우건설의 새로운 임자로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정부가 해당 대기업과 밀약을 맺고 이번 산업은행과 금호의 재무구조개선 약정에 대우건설을 포함시켰다는 말도 흘러나오는 중이다. 또한 대우건설은 대한통운의 2대주주(지분율 23.95%)이기도 해 물류사업 역시 안심할 수 없게 됐다.
금전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금호는 주당 2만 6262원에 대우건설을 인수했지만 산업은행엔 절반 수준인 1만 3000원대에 넘기기로 계약했다. 금호의 대우건설 매각이 현실화하면 재계서열에서도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금호의 자산총액은 37조 5000억 원이지만 대우건설이 빠지면 27조 원대로 줄어든다. 이렇게 되면 라이벌 한진(29조 1350억 원)에도 밀리게 돼 금호로서는 더욱 뼈아플 듯하다. 두산과 한화와도 10위권을 놓고 치열한 자존심 싸움을 벌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