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69
선조들이 수베개를 처음 사용한 구체적인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고려시대 때부터 수베개 문화가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베갯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송나라 사절단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의 견문록 <고려도경>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로 채우고, 양쪽 마구리는 실로 꽃을 수놓았는데 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붉은 잎으로 장식한 것이 연꽃잎과 같다.”
옛 여인들에게 베개는 단순한 침구가 아니었다. 만들고 괴는 이의 영혼과 내력이 오롯이 깃든 물건으로, 좋고 나쁜 꿈이 베개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예부터 어머니들은 호롱불 아래서 부모와 남편, 자녀를 위해 간절한 소원과 바람을 담아 한 땀 한 땀 베갯모에 정성스럽게 수를 놓았다. 무병장수와 자손의 번성, 그리고 부부의 금슬을 기원하는 문양이 많았다. 또한 가족에게 해를 끼치는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글자를 담기도 했다.
사진제공=한국자수박물관
또한 베갯모에는 상서로운 동식물과 함께 염원을 담은 글자를 수놓았는데, 흔히 부(富)·귀(貴)·수(壽)·복(福)·희(囍)·강(康)·녕(寧) 등이 많이 쓰였다.
이어령 박사는 일찍이 전통 베갯모의 문양을 한국적 판타지의 산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우리문화 박물지>의 한 대목을 옮겨 보자.
‘베갯모 위에 수놓인 것 중에 외톨박이란 없다. 모두가 한 쌍이다. 원앙처럼 둘이 하나가 되는 화합의 세계, 작은 베갯모 속에 모든 행복과 가족이 그리고 우주가 응축된 꿈이 숨어 있다. …프로이드의 꿈과 마찬가지로 베개의 꿈도 성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베갯모에 수놓은 섹스는 뒤틀리고 억압되고 음산한 포장 뒤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밝고 정교하고 풍요롭다.
때로는 한 쌍의 봉과 일곱 마리의 새끼봉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구봉침이 되기도 하고, 복 복(福)자를 닮은 박쥐의 문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근엄하고 현학적인 딱딱한 한자까지도 베갯모의 작은 우주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한 폭의 꽃이나 오월의 나뭇잎처럼 현란한 색채로 피어난다.
…십장생도는 한국의 생활용구 어디에고 그려져 있는 것이지만 베갯모에 그려졌을 때만큼 생생하지 않다. 그것들은 현실이라기보다 모두 꿈속에서 본 것 같은 판타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가 놓인 베갯모는 대개 둥근 형태이나 네모진 것도 적지 않다. 흔히 둥근 것은 여성이, 네모진 것은 남성이 사용했다. 베갯모에 수를 놓을 때 사용되는 밑그림을 ‘수본’이라고 부르는데, 크게 궁중용과 민간용으로 나눌 수 있다.
궁중용 수본은 전문 화공이 기름종이에 그린 것으로 세련되고 화려한 게 특징이었다. 반면 민간용 수본은 지역마다 특징이 조금씩 달랐지만 수수하고 해학적인 문양이 많았다. 예부터 전북 순창 지방에서 쓰이던 민간용 수본이 유명했는데,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판각하여 먹을 칠해 종이에 눌러 찍은 것이었다. 마치 판화를 찍듯 이런 방식으로 수본을 여러 장 만들어 장날에 내다 팔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수본 덕분에 제대로 자수를 배우지 못한 시골 아낙이라도 정성을 담아 가족의 베갯모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녀와 남편이 잠든 뒤 홀로 호롱불 곁에서 소박한 기원과 바람으로 베갯모를 수놓았던 수많은 어머니들. 그래서 전통 베갯모에는 아내의 눈물과 어머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와 자식의 마음이, 아내와 남편의 정이 베갯모를 통해 하나로 끈끈하게 이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전통 수베개와 베갯모는 안타깝게도 점차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다양한 기능을 지닌 첨단 베개가 쏟아지고 있지만, 어머니의 마음과 땀이 깃든 수베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언론인 출신 전통문화 전문가였던 고 예용해 선생의 수베개에 대한 글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베갯모는 그날그날의 삶이 좋았거나 궂었거나 역겨웠거나 자랑스러웠거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의 반려로 아무 말이 없이 오직 화사한 아름다움과 애틋한 기원을 담고 잠자리를 감싸준다.
베갯모가 떨어져나간, 시체 같은 베개를 베고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난질이 잦고 생이별과 이혼이 흔한 현대의 사회현상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는 것인지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든다.’ (<예용해전집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