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화끈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비밀이…
이국적인 외모로 1970~80년대를 주름잡던 재니스 디킨슨. 외모만큼이나 화려한 사생활로 유명하다.
폴란드계 어머니와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아버지를 둔 재니스 디킨슨은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에서 성장했다. 틴에이저 시절 ‘미스 하이 패션 모델’ 콘테스트에 참가해 입상했고, 그 경력을 토대로 1970년대 초에 뉴욕에 진출한다. 파란 눈에 금발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는 모델로서 힘든 시절을 보낸다. 이때 만난 사람이 포토그래퍼인 자크 실버스타인. 그의 여자친구는 배우인 로레인 브라코였는데, 브라코는 재니스 디킨슨에게 유럽행을 권했다. 그곳에 가면 ‘뜰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브라코의 충고는 현실이 되었고, 파리에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1978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녀의 화끈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삶이 시작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정신병적인 아동 성애자였고, 재니스 디킨슨은 틴에이저 시절 항상 근친 강간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성관계를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에게, 아버지는 매일같이 욕설과 폭력을 휘둘렀다. “나는 괴물로부터의 생존자다. 나는 16년 동안 비밀을 지키도록 강요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아동 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할 경우, 난 아버지에게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못 박았다. “나는 아동 성애자들은 법적으로 거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그녀는 세 권의 회고록을 통해 모델 시절의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성형 경험을 털어놓았고 거식증과 음식을 먹으면 토해야 했던 시절과 알코올중독 등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남자 관계였다. 1970년대 말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당시 모델 평균 개런티의 4배인 일당 2000달러를 벌었고 A급 광고 모델이 되었으며 <하퍼스바자> <코스모폴리탄> <보그> <엘르> <마리클레르> 등 수많은 패션 잡지의 단골 표지 모델이었고, 캘빈 클라인이나 발렌티노, 베르사체 등의 사랑을 받았다. 크리스찬 디오르, 맥스 팩터, 레블론 등의 브랜드도 그녀를 모델로 내세웠다. 37번이나 <보그> 커버를 장식했고, 7개월 연속 <엘르> 표지 모델인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사교계의 중심부로 진출했고 앤디 워홀이나 트루먼 카포티 등을 비롯 수많은 셀러브리티들과 어울렸다.
재니스 디킨슨(왼쪽)과 실베스터 스탤론.
그런데, 1994년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1987년 두 번째 남편 사이먼 필즈와의 사이에 첫 아이를 낳았던 디킨슨은 그와 이혼한 지 1년 만에 두 번째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를 알 수 없었다. “임신을 했던 시기, 나는 다섯 명의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그녀는, 실베스터 스탤론을 아버지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스탤론과 디킨슨 사이에 격렬한 법정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유전자 감식을 통한 친자 확인에 들어간다. 당시 그녀가 관계를 맺었던 다섯 남자의 유전자 샘플이 법정에 제출되었고, 검사 결과 스탤론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님이 밝혀졌으며 마이클 번바움이라는 남자가 아버지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그녀의 거침 없는 행보는 이어진다. 디킨슨은 리얼리티쇼의 심사위원이 되었는데, 2003년엔 <아메리카 넥스트 톱모델>에서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매회 동료 심사위원과 논쟁을 벌이며 충돌했고, “나는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 코웰이 하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은 네 시즌 만에 중도 하차했다. 2006년엔 그녀가 모델 에이전트에 도전하는 <재니스 디킨슨 모델 에이전시>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붙였던 ‘세계 최초의 슈퍼모델’이라는 표현에 대한 시비도 있었다. 1940년대부터 사용되었고 1960년대엔 ‘트위기’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영국의 레슬리 로슨이 실질적으로 최초의 슈퍼모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전진했으며 포토그래퍼로 변신했고 자신의 주얼리 브랜드를 론칭했다. 계속 회고록을 내면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자신에 대해 드러냈다.
그런데 그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황스럽게도, 아무도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몰랐다. 생일이 2월인 건 확실해 보였다. 15일 아니면 17일 아니면 28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1951년, 1952년, 1954년, 1955년, 1960년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그녀는 힌트를 주었다. 자서전에서 “18개월이 된 1957년에 나의 가족은 브룩클린에서 플로리다로 이사를 갔다”고 이야기한 것. 사람들은 드디어 그녀가 태어난 해를 알게 되었다. 1955년이었던 것. 하지만 2007년에 출연한 어느 리얼리티쇼에서 그녀는 자신이 53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1954년생일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인터뷰에선 32세에 첫 결혼을 했다며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의 생년월일을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혼동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 자신도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