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씨의 삶은 거의 교도소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야말로 ‘철창 인생’이었다. 그는 28세였던 76년 광주OB파와 한판 전쟁을 치른 후 전남도경에 검거되어 징역 6월을 살았다. 이후 현재까지 4~5차례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약 30년 세월동안 거의 25년 가까이를 ‘옥중인’으로 지냈다.
김씨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지난 75년 봄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조양은씨가 ‘기린아’로 떠올라 있었다. 조씨는 75년 새해 벽두 서울의 주먹 패권을 신상사파에서 호남파로 돌려놓은 계기가 된 ‘사보이호텔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중앙무대를 장악한 호남파는 이후 오아무개씨와 박아무개씨가 서로 대립하는 내분을 겪으면서 양분된다. 당시 양대 오야붕인 오씨와 박씨의 각각 직계 행동대장들이 바로 조씨와 김씨였다.
76년 3월 서울 무교동 E호텔 주차장에서 호남파의 실질적 보스였던 오씨에게 김씨가 린치를 가했다. 치명상을 입은 오씨는 주먹계를 은퇴했고, 그의 직계 부하였던 조씨가 대신 ‘양은이파’를 결성해서 조직을 이끌었지만, 이때부터 힘의 균형은 서서히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파’로 옮겨지게 된다. ‘서방’은 김씨가 자라난 광주의 동네 이름이다.
하지만 김씨는 다음해인 77년 10월 오씨 린치 사건과 신민당 각목전당대회 등으로 구속된다. 보스의 구속으로 서방파가 다소 주춤한 사이 양은이파가 서울의 밤을 장악하게 된다. 김씨는 3년형을 살고 80년 초 다시 사회에 나왔지만 당시는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가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였다.
김씨는 출소하자마자 그해 7월 다시 채권채무 해결 폭력사건과 관련한 폭력범죄단체 결성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당시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라이벌 조씨는 이미 2월에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은 상태였다. 두 거물급 주먹의 수감으로 서울 무대는 OB파의 득세로 이어진다.
86년 1월 출소한 김씨는 서방파 조직을 재규합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86년 6월18일 서울 한양대앞 한강 둔치에서 전국의 주먹들을 소집해서 가진 ‘새마을 축구대회’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이 참석하는 등 여야 정계 실세들이 축하차 다녀가거나 금일봉을 전달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7월의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의 주범으로 다시 체포되어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89년 1월 폐암 판정을 받으면서 김씨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왔지만, 신우회 결성이 ‘범죄단체 조직’으로 인정되면서 다시 90년에 검거됐다. 여기서 김씨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형집행정지도 취소됐다. 또한 수감중이던 97년에는 공문서 위조교사 혐의까지 인정돼 징역 1년6월이 추가되기도 했다.
90년 5월 검거 후 꼬박 14년 4월의 징역을 산 김씨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형량 만기의 날이 이제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보호감호 7년이 남아 있었다. 만약 보호감호까지 살게 된다면 김씨는 오는 2011년에나 출소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나이 63세가 된다. 28세에서 63세까지 거의 한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셈이다. 이번에 김씨가 어떻게 하든 사회의 햇빛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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