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도 다시보자’ 자나깨나 리빌딩
지난해 두산과의 공식개막전이 끝난 뒤 삼성의 이수빈 구단주(맨 오른쪽)와 라이온즈 김인 대표이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선수단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프로야구 초창기 프런트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구단 운영의 주도권을 감독이 쥐었다. 사실상 실업야구와 같은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다. 프로 구단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선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이 최종 결정권을 쥐는 게 대부분. 자연스럽게 프런트를 대표하는 사장과 늘 알력싸움을 하게 됐다. 프로야구단의 모기업에서 일명 ‘낙하산’을 타고 구단으로 내려온 사장들은 현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권위부터 앞세우곤 했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쏟아졌다. 1980년대 후반 A 구단 사장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감독을 해고해 물의를 빚었다. B 구단 사장은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매일 감독을 사무실로 불러 무릎을 꿇게 했다. 야구를 모르면서 현장을 통제하려 하니 어처구니없는 지시도 많았다. C 구단 사장은 한 선수가 빗맞은 안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힘들게 치지 말고 모든 선수에게 저렇게 치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말해 비웃음을 샀다. D 구단 사장은 “투수 9명이 매일 1이닝씩 던지면 된다”는 무식한 논리로 투수의 수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일반 기업체와 마찬가지로 ‘생산성’을 높이고 싶었던 사장들의 눈에, 예측을 할 수 없는 야구는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모기업에서 여러 차례 경영진단을 나왔지만, 야구단을 감사했던 엘리트들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
# ‘프런트 야구’의 시작
한국 프로야구에 ‘프런트 야구’의 새 방향을 제시한 팀은 1990년의 LG였다. 이광환 감독과 손잡은 LG는 구단과 선수단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LG 야구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시기다. 1994년에는 프런트가 공들여 스카우트 해온 서용빈·유지현·김재현 신인 3총사가 ‘신바람 야구’ 돌풍을 일으키면서 최고 인기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LG가 다진 기틀을 더 발전시킨 팀은 현대였다. 전성기를 이끈 김재박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기용을 비롯한 경기 내적인 부분만 지휘했다. 트레이드, 외국인선수와 신인 선발, 2군 운영 등은 구단이 총괄했다. 프런트와 현장의 호흡도 잘 맞았다. 현대 프런트는 적재적소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선수의 기량을 철저히 분석해 트레이드도 성공시켰다. ‘현대 왕국’의 기반은 그렇게 다져졌다.
그러나 한때 모범사례를 제시했던 LG는 2000년대 들어 몰락했다. 2군에 모아 놓았던 유망주들은 다른 팀으로 이적한 뒤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고, 신인들은 훈련장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가 몇 년 안 돼 종적을 감췄다. 한때 구단을 이끌던 인사들이 물러난 뒤에는 팀을 이끌던 구심점마저 사라졌다. 오너 일가의 야구 사랑도 오히려 독이 되곤 했다. 눈앞의 성적에 급급해 감독을 바꾸고 단장을 교체하던 LG는 결국 2002년부터 2011년까지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LG 프런트는 1994년 서용빈·유지현·김재현(왼쪽부터) 신인 삼총사를 스카우트해 대히트를 쳤다. 이들의 활약으로 그해 우승과 함께 최고 인기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 프런트는 무슨 일을 하나
현대 야구에서 프런트의 비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구단을 ‘잘’ 운영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우선 검증된 인재가 드물다. 검증방법도 별로 없다. 야구단 업무를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 유능한 프런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단은 다른 프로 스포츠에 비해 조직이 매우 방대하고 섬세하다. 국내 구단들도 각각 30~40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같은 프로 종목인 농구, 배구, 축구의 프런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 인원이다. 게다가 한 명의 야구단 프런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노하우가 생긴다. 프런트는 시야가 넓어야 하고,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현장과의 갈등도 매끄럽게 봉합해야 한다. ‘신생구단에는 감독보다 프런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은 이유다.
야구단 운영의 목표는 당연히 팀을 4강에 올려놓는 것이다. 한정된 선수자원과 예산은 프런트에게 주어진 음식재료와 같다. 어떻게 그 재료들을 요리하느냐에 따라 팀 성적과 프런트의 능력이 갈린다. 무엇보다 선수들에 대한 면밀한 평가가 핵심이다. 군 입대와 세대교체, 부상자 발생, 외부 전력 영입과 기존 자원 방출 등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늘 대안을 마련해놓아야 한다. 수십 명의 선수들을 하나하나 파악하지 못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십상이다. LG와 한화가 하위권으로 처진 뒤 연례행사처럼 ‘리빌딩’을 입에 올리는 이유, 그리고 전성기의 해태와 현대가 ‘리빌딩’을 하면서도 성적을 냈던 비결이 결국은 이런 능력과 일맥상통한다.
# 성적에 울고 웃는 공동 운명체
프런트와 선수단은 사실 공동 운명체다. 결국은 성적에 따라 울고 웃는다. 상위권팀 프런트들은 겨울이 행복하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하면 주머니까지 두둑해진다. 같은 일을 해도 훨씬 즐겁다. 하위팀은 반대다. 팀을 발전시키기 위해 머리를 짜내느라 휴식기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사실 성적은 선수들이 올리고 내린다. 프런트가 아무리 잘 해도 선수가 야구를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단 직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한 뒤, 좋은 성적이 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대신 프런트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팀을 망가뜨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프런트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좋은 프런트 아래 나쁜 선수단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쁜 프런트 아래 좋은 선수단은 절대 나올 수 없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