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물 닦느라 코 만졌다가…앗!
지난 시즌 두산 오재원과 작전코치가 사인을 교환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 팀마다 다른 공격 사인, ‘사인왕’은 역시 김성근 감독
김성근 감독
감독의 성향도 사인의 양과 질을 좌우한다. 롯데를 지휘했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작전을 거의 쓰지 않아 사인 자체도 많지 않았던 대표적인 사령탑이다. 반면 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은 1980년대 OB 감독 시절부터 가장 최근 몸담았던 SK 시절까지 역대 가장 많은 사인을 만들고 활용한 사령탑으로 꼽힌다. 코치들과 선수들이 숙지해야 할 사인의 종류만 20가지가 넘고, 번트 사인만 해도 드래그번트·푸시번트·세이프티번트·위장 스퀴즈번트 등 여러 개로 나뉜다. B 코치는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작전만 해도 수십 가지다. 그만큼 사인이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1년에 한 번을 쓰는 작전이라 해도 코치와 선수들은 그 신호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 3루 코치의 복잡한 동작에 담긴 의미
주자가 나갔을 때 3루 코치의 움직임을 보면 무척 재미있다. 머리를 만졌다가, 모자를 건드렸다가, 코를 잡았다가, 가슴을 툭툭 치는 등 수없이 손을 움직이며 몸 여기저기를 만진다. 앞서의 A 코치는 “한 번 사인을 낼 때 보통 10개가 넘는 동작을 취하는 것 같다. 많을 땐 20번도 넘는다”고 증언했다. 일반인들은 물론 상대팀도 당연히 해독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많은 동작 전체가 사인인 것도 아니다. 선수들만 알 수 있는 ‘키(Key) 사인’이 있다.
선수와 사인을 주고받는 넥센 심재학 코치.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A 코치는 “복잡한 사인에는 기준이 되는 동작이 있다. ‘모자’가 그날의 키라고 한다면 모자를 만지지 않고 나가는 사인은 속임수다. 모자를 만지고 난 다음에 나오는 게 진짜 작전 사인이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키 사인은 매일 바뀐다. 어떤 날은 코를 만진 후가 진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어깨를 만진 뒤가 진짜일 수도 있다. A 코치는 “심지어 모자를 만진 뒤에도 어떤 게 진짜인지는 날마다 다르다. 모자를 만진 직후 첫 번째 동작일 수도 있고, 가장 마지막 동작일 수도 있다”며 “그러니 상대팀에 작전을 간파당한다고 해도 사인 자체를 읽힌 것은 아닐 때가 많다.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상대팀에서 눈치를 챈 것뿐”이라고 했다.
보통은 타자의 집중력을 고려해 4~5번째 동작 전후로 진짜 사인을 내지만, 요즘은 ‘취소 사인’을 덧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박수를 한 번 치는 게 키 사인, 팔꿈치를 만지는 게 취소 사인’이라는 약속을 미리 한다고 치자. 3번째 동작에 박수를 치고 4번째에 가짜 사인을 낸 뒤 6번째 동작쯤에 팔꿈치를 만진다. 그리고 다시 9번째 동작에 박수를 치면 그 이후가 ‘진짜’ 사인이라는 신호다. C 코치는 “이 정도로 복잡하지만 선수들이 숙지만 잘 하면 사인 미스는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며 “감독님이 작전 사인을 주지 않을 때도 진짜 사인이 나올 때를 대비해 매번 사인을 내는 척을 하곤 한다. 이때는 당연히 키 사인을 주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 ‘사인’과 ‘시그널’의 차이, 수비코치 보면 안다
야구에서는 사인과 시그널(Signal)을 구분한다. 사인은 비밀스럽지만, 시그널은 공개적이다. 3루코치가 주자에게 더 뛰거나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거나, 수비코치가 손으로 야수들에게 번트 시프트를 지시하는 동작이 바로 시그널이다. 최근에는 상대팀 주전 타자들의 주된 타구 방향에 따라 내·외야수들의 수비 포메이션을 조정하는 시프트가 종종 이뤄진다. 수비코치들이 시그널을 보내는 빈도도 더 높아졌다. D 코치는 “우리 팀은 심지어 공 하나마다 볼카운트와 상황에 따라 다른 시프트 신호를 보낸다”며 “가끔 베테랑 외야수들이 글러브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는 건, 스스로 타구를 판단해 잡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감독도 보통 큰 손동작으로 야수들에게 시프트를 지시하지만 때로는 ‘전진수비는 1번, 중간수비는 2번, 정상수비는 3번’과 같은 사인으로 의사를 전달하기도 한다.
# ‘사인의 집합체’ 포수는 왜 안방마님인가
삼성 선발 장원삼이 포수에게 사인을 보내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사실 포수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장 피곤한 자리다. 감독, 투수, 배터리코치, 수비코치, 작전코치, 야수들과 모두 사인을 교환해야 해서다. 포지션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수비 사인을 모두 외워야 하고, 타석에도 서야 하니 공격 사인 숙지도 필수다. 무엇보다 기본은 볼 배합. 올 시즌 팀별 경기 평균 투수구는 156개인데, 이 공 하나하나의 구종과 코스를 선택해 사인을 내야 한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도 영민하게 경기 상황을 꿰뚫고 머리를 써야 한다. E 감독은 “예전에 서로의 사인에 한참 고개를 흔들고 실랑이를 하면서 상대 팀을 당황하게 하던 배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투수는 직구와 커브밖에 던질 줄 몰랐다”며 “포수가 상대팀을 교란시키기 위해 투수와 작전을 짠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오늘도 프로야구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남몰래 소통하고 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사인 교체 주기 감독·포수 바뀔 때 또 다시 ‘고난의 시간’ 사인이 너무 자주 바뀌면 팀 내부에 혼란이 올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노출된 사인을 그냥 쓸 수도 없는 일. 팀에 한 차례씩 변화가 찾아올 때마다 모든 사인은 재정비된다. 동시에 감독, 코치, 선수들에게는 다시 한 번 고난의 시간이 찾아온다. 시즌 중에 사령탑이 교체된 LG가 그랬다. 양상문 신임 감독은 부임 후 첫 경기를 치르기 전, 최태원 작전코치와 함께 간단한 동작으로 구성된 팀 사인을 새로 맞췄다. 첫 3연전을 모두 마친 후에는 다시 새로운 사인을 추가하고 보완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인의 축이 되는 포수가 트레이드 됐을 때도 사인 전면 교체는 필수. 메이저리그나 일본에서는 이런 이유로 같은 리그끼리 포수 트레이드를 꺼린다. 의외로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삼성 류중일 감독은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냈는데 상대 배터리가 피치아웃으로 공 하나를 빼 주자를 잡아낼 때가 가장 아찔하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사인을 다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류 감독은 “피치아웃은 상대팀 벤치나 투수, 포수가 감으로 결정할 때도 많다. 그러나 당한 팀 입장에서는 아웃카운트 하나와 주자를 잃는 것을 넘어, 그날 경기 나머지 이닝에서 히트 앤드 런을 쉽게 할 수 없다. 사인이 노출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해서다”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경기가 끝나자마자 감독에서 3루코치, 다시 3루코치에서 타자에게 전달되는 사인 체계를 다 바꾼 뒤 새로운 게임을 준비한다. 이럴 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도 있다. 한 팀이 개막 전에 최소한 세 가지 이상의 패턴을 준비해 놓는 것이다. 상대에 읽혔다 싶으면 곧바로 1번에서 2번 패턴으로 변화를 준다. 류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준비한 패턴들을 상황에 따라 로테이션으로 사용한다”며 “한 시즌 동안 사인이 자주 바뀌지만, 패턴을 활용하면 선수들도 덜 헷갈리게 된다”고 했다. 아무리 보안과 대비를 철저히 해도, 사인이 읽힐까봐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KIA 선동열 감독은 “처음 감독이 됐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동작 가운데 진짜 사인 동작을 취할 때 힘이 들어갔다”며 “상대가 피치아웃을 시도할 상황이 아닌데도, 도루 사인을 받은 주자가 피치아웃에 걸려 아웃이 되면 이후 사인 내는 게 겁이 났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다른 감독 역시 “잠실, 문학, 사직구장은 감독 자리가 상대에게 잘 보이기 때문에 벽 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사인을 낸다”고 토로했다. [은] |
사인 미스&사인 도둑 누군 못 외워서, 누군 훔쳐 읽어 ‘문제’ 많은 코치들은 “아무리 사인을 숙지시켜도 한 팀에서 적어도 2~3명, 많게는 4~5명은 꼭 문제아가 생긴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프링캠프 때 수도 없이 주입식 교육을 시키고 시즌 중에도 미팅을 통해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그래도 절대 못 외우는 선수는 어느 팀에나 있다는 얘기다. B 코치는 “번트 사인을 냈는데 선수가 강공을 시도해 안타를 쳤더라도 감독은 선수를 나무란다. 결과는 승리에 도움이 됐더라도, 과정이 팀워크를 해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끔은 의도하지 않은 해프닝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C 감독은 “감기 때문에 콧물을 닦느라 무심코 코를 만졌는데, 작전코치가 당시 약속됐던 도루 사인으로 착각해 엄청나게 느린 1루주자가 도루하다 아웃됐다”며 웃었다. 사인 미스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사인 훔치기’다. 한국야구위원회(KBO) 대회요강에는 ‘벤치 내부, 베이스코치 및 주자가 타자에게 상대 투수의 구종 등을 전달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퇴장 등 제재를 부과받는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한 원로 감독은 “사인은 모든 팀이 다 훔친다.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쳐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실제로 사인 훔치기로 인한 시비는 종종 일어난다. 지난해 8월 문학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SK의 경기가 그랬다. 두산 오재원이 2루에서 지속적으로 사인을 훔쳐본다는 의심을 받았고, SK 윤희상이 오재원의 머리 쪽으로 빈볼을 던져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다. D 코치는 “주자가 2루에 있을 때 포수의 사인이 가장 잘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절대 있을 수 없는 문제라서 누가 고백하지 않는 한 의심만 할 수밖에 없다”면서 “물론 주자들도 투수가 준비할 때 스타트를 빨리 하기 위해 자기 나름의 동작이 취하는데, 그게 사인을 알려주는 것처럼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부 팀들은 일부러 특정 선수가 사인을 훔친다는 의혹을 제기해 상대의 평정심을 흔들기도 한다. 일종의 작전이다. E 코치는 “사실 선수들에게는 요주의 인물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오해의 소지도 많고, 해당 선수가 ‘안 훔쳤다’고 하면 그만이라 잡아내기 어렵다”며 “서로의 스포츠맨십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