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손’, 축구에만 있는 게 아니다
SK 투수 김광현이 공을 갖지 않은 채 태그를 시도, 이것이 아웃판정이 내려져 논란이 됐다. 아래 사진은 문제의 장면. 사진제공=SK 와이번스
양 팀이 0-0으로 팽팽하게 맞선 4회말 2사 2루. 삼성 박석민의 내야플라이 타구를 잡기 위해 SK 투수 김광현, 1루수 앤드류 브라운, 3루수 김연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세 명의 수비수가 서로 눈치를 보다 잡지 못한 공은 그라운드로 떨어져 안타가 됐다. 그 사이 2루주자 최형우는 3루를 지나 홈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때 타구가 크게 바운드되며 튀어 오르자 다시 수비수 셋이 모두 공을 향해 글러브를 내밀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김광현은 앞으로 달려가던 관성에 의지해 최형우를 태그했다. 심판의 선언은 아웃. SK의 실점 없이 이닝은 종료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TV 중계 리플레이를 통해 예상치 못한 장면이 공개됐다. 공이 빨려 들어간 글러브는 김광현의 것이 아닌 브라운의 것이었다. 심판의 아웃 콜에 오히려 당황한 김광현과 브라운이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귀엣말을 나누고 공을 떨어뜨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잡혔다.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해프닝. 잠잠하던 야구계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 전혀 다른 의미의 ‘유령 태그’
사실 ‘유령 태그’는 신조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실제로 존재하는 야구의 룰이다. 폴 딕슨은 자신의 저서 <야구 불문율(The Unwritten Rules of Baseball)>에서 동료 선수를 보호하는 플레이(Neighborhood Play)의 사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령 태그(Phantom Tag)를 언급했다.
과거에는 주자와 수비수 사이의 몸싸움이 심했다. 특히 주자가 병살을 피하기 위해 수비수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빚어져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잦았다. 규칙대로라면 야수는 병살 플레이 때 반드시 선행주자가 뛰어드는 베이스를 밟아야 포스아웃을 시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베이스로 슬라이딩해 들어오는 주자와 충돌해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대로는 양쪽 다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게 바로 유령 태그다. 병살 시도 때 야수가 베이스를 정확하게 밟지 않아도, 송구가 정확하고 수비수가 베이스 가까이에 있어 아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베이스를 찍은 것으로 인정하는 규칙이다. 네티즌들이 김광현을 비꼬기 위해 사용했던 이 단어에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빈 글러브 태그’ 해프닝 이후 김광현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광현이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요지는 ‘심판이 콜을 했을 때 곧바로 양심선언을 했어야 했다’, ‘경기 후에라도 정식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SK 구단 홈페이지에 성난 야구팬들의 항의가 몰린 탓에 프런트는 한때 김광현의 사과 기자회견을 계획했다가 철회했을 정도다.
그러나 직접 현장에서 뛰었거나 뛰고 있는 야구 관계자들의 의견은 그 반대다. 투수 출신인 A는 “경기를 치르다 보면 온갖 돌발 상황들이 발생한다. 김광현이 그 찰나의 순간 ‘심판을 속여야겠다’고 판단하고 태그를 했을 리가 없다. 또 심판의 콜이 나오고 나서 곧바로 ‘내 글러브에는 공이 없었다’고 이실직고할 만큼의 판단력이 개입되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본다”며 “심판이 자신과 팀에게 유리한 ‘오심’을 했을 때 스스로 바로잡는 선수가 과연 프로야구 역사상 얼마나 있었을까. 워낙 상황이 독특해 더 화제가 됐을 뿐, 김광현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타자 출신의 B 역시 “그렇게 타이트한 승부에서 주자가 내 눈앞으로 달려들면서 득점을 하려고 했다면, 나였어도 글러브에 공이 들어왔다는 확신이 없어도 일단 본능적으로 태그를 했을 것 같다”며 “심판이 오심을 했고 삼성이 어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특이하고 순간적인 상황이었다. 김광현의 도덕성을 운운하는 것은 너무 비약인 것 같다”고 감쌌다. 이번 해프닝은 ‘속임수’보다 오히려 ‘오심’ 논란에 가깝다는 의미다.
C 야구인은 ‘김광현을 비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전제하에 “최근에는 TV 중계 화면을 통해 경기 중에 벌어지는 그 어떤 속임수도 다 들통 나고 만다. 또 경기 중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큰 조명을 받는다. 그만큼 선수들의 에티켓이나 스포츠맨십에 대해 팬들이 굉장히 민감해지고 엄격해지는 추세”라는 견해를 내놨다.
이 야구인은 “과거에는 투수가 타자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진 뒤 ‘승부의 세계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절대 사과하지 말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맞서라’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은 고의가 아니었다면 모자를 벗어서라도 사과의 뜻을 표현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예를 들면서 “만약 김광현이 곧바로 ‘내 글러브에 공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면 지금과 반대로 어마어마한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떳떳한 패배’, ‘1점보다 중요한 양심’ 등의 헤드라인과 함께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 야구의 또 다른 기술, ‘속임수’
김광현은 “의도적으로 속이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야구에는 의도치 않은 속임수보다 작정하고 상대를 속이기 위한 트릭이 훨씬 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투수는 타자의 타이밍을 뺏고 주자를 불시에 잡아내기 위해 수십 가지 사인과 동작들을 개발한다.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이 들어와도 미트를 잘 움직여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받아내야 유능한 포수로 인정받는다. 원 바운드로 떨어진 공을 재빨리 글러브로 밀어 넣고는 마치 ‘내가 잡았다’는 듯이 손을 치켜들어 심판과 상대 주자를 교란시키는 건 영리한 야수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결국 상대를 잘 속이는 것 역시 야구를 잘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야구 불문율>에는 경기 중 나오는 다양한 속임수의 사례도 언급돼 있다. 예를 들면 안타를 친 타자주자가 1루에 멈추는 척하며 수비수를 안심시킨 뒤 갑자기 2루로 뛰어가는 동작, 수비수가 공을 잡지 못한 것처럼 속인 뒤 베이스를 떠난 주자를 잡는 히든 볼, 송구가 오지도 않았는데 공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상대 주자의 진루를 막는 속임수 동작, 송구가 날아오는데 마치 공이 오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천천히 오는 주자를 잡아내는 동작 등을 ‘야구의 기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례로 kt 위즈 용병타자 앤디 마르테는 이 가운데 마지막 사례를 제대로 시연해 ‘찬사’를 받곤 한다. 3루수인 마르테는 상대팀의 안타 때 1루주자가 3루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리면 일부러 포구 준비를 하지 않고 두 팔을 내린 채 멍하니 서서 외야를 바라보는 동작을 취한다. 3루만 바라보고 달려올 뿐 뒤를 볼 수 없는 주자에게 ‘아직 공이 3루로 오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안심한 주자가 가속도를 내지 않는 사이 외야수의 송구가 3루로 향하고, 마르테는 재빨리 공을 낚아채 3루에서 아슬아슬하게 주자를 태그아웃시킨다. 앞서의 A 야구인은 “야구 규칙에 어긋나지 않고 상대의 부상을 유발하지 않는 선이라면 이 정도 할리우드 액션은 용납될 수 있다. 마르테 외에 이전의 용병 타자들도 이런 연기를 종종 하곤 했다”고 귀띔했다.
# 상대를 속이는 ‘위장’ 전술의 묘미
1995년 위장 스퀴즈번트를 처음 선보인 OB 김인식 감독. 사진은 두산 감독 시절 모습.
상황은 이렇다. 연장 10회초 1사 1·3루서 타석에 있던 OB 이명수가 스퀴즈번트 동작을 취한 뒤 헛스윙을 했다. 스타트를 끊는 척했던 3루주자가 귀루했고, 롯데 포수도 3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발이 느린 1루주자 김형석이 유유히 2루 진입에 성공했다. 이명수는 곧 병살타가 될 수도 있었던 땅볼을 날렸지만, OB는 김형석을 2루로 보내 놓은 덕분에 천금 같은 득점에 성공했다. OB는 7차전에서도 다시 한 번 비슷한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최근에는 여러 팀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위장 히트앤드런’도 이 전술에서 파생됐다.
2007년에는 SK 김성근 감독이 삼성을 상대로 3차원적인 홈스틸 작전을 걸었다. 주자 2·3루서 2루주자 이진영이 일부러 리드를 길게 잡았고, 삼성 투수 권오준이 2루로 견제구를 던지려고 몸을 돌리는 사이 3루주자 김강민이 홈을 파고들었다. 삼성 유격수 박진만은 2루주자 태그에 신경 쓰느라 김강민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공식기록원이 기록위원장과 긴급회의를 한 끝에 단독 홈스틸을 인정했을 정도로 재치 있는 트릭 플레이였다.
정근우. 사진제공=SK 와이번스
또 2011년 삼성과 SK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당시 SK 2루수 정근우가 ‘위장 시프트’로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정근우는 1차전 8회말 무사 1·2루 강봉규 타석 볼카운트 0B1S서 투수 이재영이 투구 동작을 취하자 1루 쪽으로 재빨리 스타트를 끊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봉규는 정근우의 움직임을 보고 압박 수비를 예상해 번트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강공전환을 노리다가 스트라이크를 그냥 흘려보냈다. 벤치의 사인이 아니라 정근우 스스로 판단해 실행에 옮긴 플레이였다.
잘 사용한 속임수는 최고의 야구 기술이다. 야구의 전술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이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전술이 개발된다.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것만이 야구는 아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오스카상급 할리우드 액션 데릭 지터 공 오기도 전 “아얏!” 소름 돋는 명연기 2010년 9월 ‘가짜 사구’ 때문에 큰 논란에 휘말린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유격수 데릭 지터. EPA /연합뉴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지터는 현역 시절 내내 뉴욕 양키스의 ‘영원한 캡틴’으로 군림했다. 특히 가장 성실하고 스포츠맨십이 뛰어난 선수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그런 그가 2010년 9월 탬파베이와의 경기에서 과장된 동작으로 심판을 속였다. 당시 양키스와 탬파베이는 시즌 막바지까지 치열하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선두 다툼을 벌이던 상황. 양키스는 6회까지 1-2로 뒤져 있었고, 누구든 1루에 살아나가서 승부를 뒤집을 기회를 노려야 했다. 7회 타석에 들어선 지터는 탬파베이 구원투수 채드 콜스를 상대로 초구에 기습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콜스는 보란 듯이 몸쪽으로 높은 직구를 던졌다. 그 순간 지터는 펄쩍 뛰어 오르며 몸을 뒤로 돌렸고, 이내 왼쪽 손목을 잡고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캡틴의 부상을 염려한 양키스 더그아웃도 깜짝 놀랐다. 트레이너가 달려 나와 상태를 체크했다. 얼핏 보면 콜스의 직구가 지터의 손목을 강타한 듯했다. 지터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1루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반전은 그 뒤에 벌어졌다. TV 중계팀의 느린 화면으로 확인한 결과, 공은 지터의 손목이 아닌 배트 손잡이 부분에 맞고 튀어 나갔다. 지터는 공이 방망이를 강타하기도 전에 이미 손에서 배트를 놓고 피한 뒤였다. 탬파베이 벤치에서 격하게 항의했지만, 지터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1루에 서 있었다. 결국 다음 타자 커티스 그랜더슨의 역전 2점홈런이 나오면서 지터는 홈까지 밟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양키스는 그날 재역전패를 당했다. 지터는 경기가 끝난 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사실은 공에 맞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 발언 탓에 갑론을박은 더 뜨거워졌다. 지터를 비난하는 야구 관계자들은 “지터처럼 어린이들은 물론 다른 선수들에게도 롤모델인 선수가 그렇게 기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반대로 메이저리그 감독과 선수를 비롯한 현장 사람들은 “지터의 연기는 훌륭했다. 선수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지배적으로 보였다. 메이저리그 포수 출신인 한 방송 해설자는 “그게 왜 논쟁거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지터의 행동을 속임수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항변했고, 다른 팀 감독 역시 “야구장에서 선수는 배우가 돼야 한다. 지터는 고양이처럼 약삭빨랐다”고 오히려 치켜세웠다. 무엇보다 바로 맞은편 더그아웃에서 지터의 행동을 지켜봤던 ‘적장’ 조 매든 탬파베이 감독(현 시카고 컵스 감독)은 경기 후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만약 지터가 우리 팀 선수였다면, 나도 (그런 행동을) 좋아했을 것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