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양덕이 표현하는 우울한 세대
코어스 작 ‘배고픈 고양이와 반쯤 먹은 물고기’
[일요신문] “덕 중 최고의 덕은 양덕”이란 말이 인기다. 덕은 오덕후의 줄임말로 오타쿠를 뜻하는데 이는 “이상한 분야에 몰두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양덕’은 오타쿠 사이에서도 급이 가장 높은 서양의 오타쿠다. 취미로 어떤 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전문가를 압도하는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가운데 서양 사람이 유독 많이 관찰되는 탓이다.
마크 란트비어. 사진=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독일의 아트토이 팀 코어스(Coarse)의 마크 란트비어(Mark Landwehr)와 스벤 바스크(Sven Washk)는 성공한 양덕이다. 이들이 취미로 시작한 아트 토이 제작은 어느덧 지구 반대편에 내한 전시까지 할 정도가 됐다. <일요신문>은 지난 14일부터 서울 송파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에서 열린 코어스의 개인전 ‘Past/present’를 찾아 ‘성공한 양덕’ 마크 란트비어(44)를 만났다.
다카시 무라카미 2014년 작 Invoking the Vitality of a Universe Beyond Imagination.
”그때 인터넷을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냥 어디에서 아트 토이 재료를 찾을 수 있나 알아봤죠. 대부분 뉴욕에서 팔더군요. 그래서 그냥 무작정 뉴욕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한 아트 토이 재료상에 전화해 재료를 주문했다.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그냥 필요한 재료라고 생각되는 세트를 모조리 주문했죠.“ 그렇게 그는 아트 토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원재료 가운데 하나인 레진을 요리조리 만져 작품을 만들던 그는 아트 토이에 빠져 들었다. 광고주의 입김에 움직이는 그래픽 디자인보다 자신의 손으로 뽑아져 나오는 아트 토이는 그의 본심을 자극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뒤인 2003년, 그는 아예 전업 아트 토이 아티스트의 삶으로 인생을 틀었다.
”두려운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통 월급이라는 족쇄에 갇혀 살지만 전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였어요. 돈도 좀 모아놨었고 그 무엇보다 이걸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는 ‘그냥’ 시작했다. 위험 부담이고 보험이고 따지기 전에 아트 토이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한 뒤 보이는 건 없었다. 동료였던 스벤 바스크도 함께했다. 둘은 ‘코어스’를 꾸렸다. 2003년 첫 항해를 시작했다.
마크 란트비어는 유쾌한 양덕이었지만 작품 방향은 정반대였다. 그 기반은 ‘슬픔’이었다. 슬픔에 집중하는 작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슬픈 감정을 유난히 좋아했다. ”슬픈 감정에 휩싸이면 감정은 깊은 어딘가로 계속 빠져들게 된다. 그 상태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요동, 그런 느낌을 나는 매우 좋아하고 많은 영감을 준다.“ 그는 영국의 록 밴드로 우울한 음악을 많이 만드는 라디오헤드의 감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바로 그것“이라고 답했다.
엠네스티와 코어스가 협업해 만든 ‘자유 촛불’. 아무런 설명 없이 여자의 억압과 슬픔이 잘 드러난다.
코어스는 슬픔과 함께 세대의 간극에 집중한다. 현재 전시 중인 작품 가운데 세대를 주제로 한 작품이 여럿 눈에 띄었다. 마크 란트비어는 ”사람은 젊을 때나 늙었을 때나 매한가지 똑 같은 사람이다. 늙어가는 기억을 잡고 싶었다“고 세대에 집중한 이유를 말했다. 이어 그는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하며 늙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어릴 땐 나이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늙어가면서 생각은 더욱 많아진다. 그 고민 사이에 뭐가 남나. 그런 감정이 출발선이었다“고 말했다.
슬픔이 중심에 있는 코어스의 전시회였지만 고양이와 라쿤 등 귀여운 작품도 보였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크 란트비어는 최근 그림책 ‘Cold Way’의 삽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라쿤과 물고기 캐릭터를 아트 토이로 제작했다. 그는 ”대부분 작품이 슬프고 좀 어두운데 밝은 프로젝트가 있어 지체 없이 시작했다“고 프로젝트 참여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익살맞은 라쿤과 물고기의 몸짓 사이에는 슬픔이 잠재돼 있었다. 힘겹게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라쿤과 허황된 말로 순진한 라쿤을 이용하려는 물고기는 코어스의 기본 감정선 위에서 탄생됐다. 뚜렷한 감정선이 전시회 전체의 중심을 잡는다.
그의 작품은 무겁고 묵직한 감정을 정교하게 형상화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통하는 특정 작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난 내가 느끼는 슬픔을 표현하려는데 집중하고 슬픔은 내게 가장 큰 감정이다.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슬픈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아트 토이 아티스트로 직업을 전환했던 일을 설명하는 마크 란트비어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내 긍정적인 에너지를 풍겼다. 좋아한다는 슬픈 감정은 오롯이 작품으로만 조각됐다. ”13년 전에 꿈꿨던 삶이랑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은 그냥 계속되는 여행과 같다. 내 미래는 뭘까 하면 사실 말하기 어렵지만 다 지나고 보면 유난히도 즐거웠던 기억 뿐“이라는 그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도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지나보면 알 수 있겠죠.“
독일의 아트토이 팀 코어스의 개인전 ‘Past/present’는 서울 송파구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에서 2월 19일까지 열린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마크 란트비어. 사진=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