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가족 잃을 슬픔 이해해야” 중단 요구 vs 누리꾼들 “대의 위해 참아라” 맞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인 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열린 범페미네트워크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추모문화제. 고성준 기자
지난 6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여성 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는 처음 시위가 계획된 지난 1일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당초 이 시위는 지난달 5일 한 30대 남성이 왁싱샵 주인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보도되면서 촉발된 것이다.
시위와 관련한 홍보가 SNS에서 이뤄진 당일인 지난 1일, 자신을 숨진 피해 여성의 유족이라고 밝힌 한 회원이 ‘여성 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다음카페’에 호소문을 올렸다. 이 회원은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저희에게 이런 큰 관심과 공론화는 정말 더는 버틸 힘조차 없이 무너지게 한다”라며 “어떤 취지이신지, 어떤 마음으로 뭉쳐주시는지 알지만 저희 유족들이 조금은 숨 쉴 수 있게 도와주실 순 없으신지요”라며 시위를 중단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한 회원은 “이 사건은 유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회적 문제에 관한 시위를 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고, 유족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솔직히 유족이란 거 거짓말 아니냐”라며 날선 비판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 다른 회원은 “(글 쓴 회원은) 유족이라도 참 이기적이다. 유족들이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기 때문에 시위를 하지 말란 거 아니냐. 피해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주장하는 것 같다”라고 비난했다.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회원도 있었다.
‘여성혐오 살인 사건 공론화 시위’ 카페에 올라온 피해자 유족을 주장한 회원의 글.
이 글에도 앞선 유족의 글과 유사한 댓글들이 달렸다. “저희는 저희의 안부를 위해 나가는 것이다. (피해 여성의) 추모 목적이 아니고 거기에 초점을 맞출 생각도 없다” “이런 사건이 또 일어나면 책임질 건가? 공론화는 필요하다”라며 맞섰다.
비난이 거세지자 카페 운영진이 진화에 나섰다. 4일과 5일 유족 관련 공지글을 올린 운영진은 “피해자 초점이 아닌 가해자 초점으로 시위를 진행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제는 참 다행으로 생각하신다는 내용을 유가족 친구 분을 통해 전달 받았다”라며 “시위에 참여할 때 이번 사건(왁싱샵 여주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여성 혐오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참가 부탁드린다”라고 밝혔다. 카페명이 ‘왁싱샵 여혐 살인 사건 시위’에서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로 최종 변경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운영진은 다른 회원들로부터 비난과 인증 강요에 시달려야 했던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유족이라고 주장한 회원의 이야기는 또 달랐다. 앞서 호소문을 올렸던 이 회원은 “카페에 올린 글 외에는 어떠한 의견도 전달한 적이 없는데 ‘시위에 대한 유가족 분들의 의견을 전달받았다’는 공지사항을 보고 다시 글을 쓴다”라며 “‘피해자 초점이 아닌 가해자 초점으로 시위를 진행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제는 참 다행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그런 의견을 전달한 적이 없다”라고 일축했다.
이어 “저희는 이 시위에 찬성한 적이 없고 오로지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사법처리와 더 이상 고인에 대한 모독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 본 사건으로 인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6일 시위에서 ‘왁싱샵 여주인 살인사건’과 관련한 사안은 모두 배제됐다. 운영진들로서는 유족들을 어느 정도 배려한 셈이지만, 시위에 참여한 회원들은 유족과 피해자의 측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의심을 거두지 않은 상태다. 운영진이 공지를 통해 “유족들에게 인증을 요구하거나 비난하는 글에 대해 삭제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들을 향한 비난과 조롱 댓글은 여전히 남아있다.
자신을 유족이라고 밝힌 회원의 글에 달린 댓글.
익명을 요구한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한 활동가는 “강력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의 유족들의 감정변화를 보면 슬픔→극심한 분노→체념과 우울로 이어진다. 여기서 분노의 경우는 가해자뿐 아니라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이슈화시키는 언론이나 대중들을 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건을 공론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족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사건을 계속 추적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유족들이 왜 분노하고 반대하겠나”라며 “사건에 대해 관심이 좀 가라앉고 나서 법정이나 유족들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렇게 앞장서서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그래놓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유족은 배제시키고 사건의 자극적인 면만 부각시킨다.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유족들을 경계한 사람들도 할 말은 있다. 지난 6일 시위에 참가한 한 참가자는 “동거녀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남성은 이미 오래 전 절연했던 피해자의 아버지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감형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라며 “이처럼 유족 합의로 합당한 형량을 받지 못하고 무마돼 버린 사건도 많은 데도 유족의 슬픔을 이유로 사건 공론화조차 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피해자는 물론, 앞으로 발생할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사회적 폭력이자 강압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일요신문>은 앞선 6일 시위를 진행한 운영진에게 유족들과 실제 연락이 닿았는지 여부와 이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시위가 진행됐는지에 대해 질의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