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핵실험 위력 최대 1메가톤 ‘수소폭탄 성공 근접’
지난 3일 오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관계자들과 6차 핵실험 결정을 논의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은 9월 3일 제6차 핵실험 직후인 오후 3시 30분경 어김없이 <조선중앙TV>의 리춘희 아나운서를 통해 중대발표를 했다. 리 아나운서는 “대륙간탄도로케트 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이 성공했다”라며 “이번 시험이 방사성 물질 누출 현상이 없었고 자연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우리 기상청은 북한의 핵실험 당시 위력은 리히터 규모 5.7로 60KT 이상으로 계산했다. 이것만으로도 지난 5차 핵실험에 비한다면 최소한 5~6배 위력이 향상된 셈이다. 하지만 미국 <CNN>,<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매체는 NOSAR(노르웨이-미국의 지진과 핵실험 탐지를 위한 조약), 과학국제안보연구소 등의 자료를 인용해 100KT(1메가톤) 안팎의 위력으로 계산했다.
진도에 따른 폭발 위력 계산은 경험상의 수치이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이번 핵실험의 위력은 지나치게 낮게 잡았다고 지적할 정도로 북한 6차 핵실험의 위력을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관련 학계에서도 주류 수소폭탄의 위력을 1메가톤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주장하는 수소폭탄 실험 성공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북한의 수소폭탄 탄두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과 다름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북한은 탄두를 탑재할 ICBM급 ‘화성-14’ 미사일 직접 발사시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북한이 앞으로 1메가톤급 위력의 수소폭탄 탄두를 ICBM급 미사일에 성공적으로 탑재하게 된다면 한반도 균형추는 급격히 기울 수밖에 없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일단 북한이 처음 수소폭탄을 언급한 때는 지난 2016년 1월 6일 진행된 제4차 핵실험부터다. 북한은 이 당시 공개적으로 첫 수소폭탄 실험에 나섰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그 위력은 10kt 안팎으로 기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다만 북한은 공개적으론 수소폭탄 실험을 주장하면서도 내부에서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동시에 이용한 증폭핵분열탄(수소폭탄의 전 단계) 수준으로 기획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에 맞춰 각종 데이터 확인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그 다음에 진행한 제5차 핵실험 역시 제4차 핵실험에 비해 위력이 약 1.25배 정도 향상됐지만, 수소폭탄의 위력까지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진행된 이번 핵실험에서 북한은 그동안 주장해 온 수소폭탄 성공에 근접한 수준까지 증명하게 됐다.
보통 증폭핵분열탄 단계에서 수소폭탄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현재 핵무기 보유국들인 경우 약 3~9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북한이 진행한 핵실험 과정을 종합해보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한다.
필자가 북한 내부 관계자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이 수소폭탄 연구에 실제 박차를 가한 시기는 2013년 7월부터다. 김정은 2013년 7월 24일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수소폭탄과 다탄두 상용화를 심도 있게 주문했다고 한다.
다탄두는 한마디로 하나의 발사체에 두 개 이상의 탄두를 장착해 위력을 배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수소폭탄과 다탄두는 사실상 함께 가져가야 하는 기술이다. 다탄두 상용화를 위해선 무게가 덜 나가면서 폭발력이 보장된 탄두, 쉽게 말해 북한이 주장하는 탄두의 소형화와 경량화가 이뤄져야 한다. 즉 다탄두는 최소한 증폭핵분열탄, 더 나아가 수소폭탄 개발 수준으로 핵물질의 폭발비율을 최대화시켜야 실현될 수 있는 기술인 셈이다. 다탄두와 수소폭탄은 ‘바늘과 실’ 같은 개념과 비슷하다.
김정은이 주관한 이 회의를 기점으로 북한의 핵폭발 능률제고 및 다탄두 기술개발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수소폭탄’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제4차 핵실험 직후인 2016년 3월 9일 김정은은 핵개발과 관련한 2.16연구소와 온누리연구소 등 핵개발 관련 연구소들을 직접 시찰했다. 필자가 북한 내부관계자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정은은 연구소 시찰 현장에서 보다 명확하게 지시사항을 강조했다.
김정은 이 자리에서 “독특한 혼합장약구조를 가지고 열핵반응을 순간적으로 급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구도로 (폭탄을) 설계 제작하라”고 언급했다. 쉽게 말해 남들이 하는 방향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독특한 방식’을 취해야 군사무기 선진국들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2018년까지 10메가톤급 수소폭탄, 이에 기반한 다탄두 상용화, 1만km급 ICBM(화성-14형) 완성을 지시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2016년까지만 해도 신빙성 있는 북한 내부소식에 의하면 핵탄두의 직경이 80cm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경 이미 핵탄두 직경을 60cm 수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최근 공개한 호리병 모형(볼링핀 모형)의 탄두는 기존 핵탄두 두 개가 합쳐진 꼴이다. 현실적으로 수소탄 탄두에 가깝다. 만약 8월 29일 발사한 ‘화성-12형’ 미사일에 이 탄두를 탑재할 수준에 도달했다면 대남 위협강도는 가히 분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탄두를 둘러싸는 폭약렌즈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 현재 90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폭약렌즈의 개수가 많을수록 폭발 효율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수준이라면 북한의 핵탄두 조작기술과 핵실험 폭발 기술개발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은 수소탄의 핵심 연료라 할 수 있는 중수소 및 삼중수소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확인된다. 필자는 북한이 몇 년 전부터 리튬 정제 및 활성화 실험을 수십 차례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로 경로로 확인했다. 이 실험은 삼중수소를 쉽게 얻기 위한 필수 실험으로 여겨진다.
한편 북한은 탄두를 장착한 발사체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1차적으로 대기권을 벗어나 곡선을 이루며 다시 대기권에 진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기권을 재진입할 때 발사체는 공기와의 마찰에 의해 6000도 이상 고열이 발생한다.
당연히 발사체는 이 고열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한 외장 소재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탄소복합체 기술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이 기술 확보를 위해 해외 주재 회사(특히 일본의 조총련계 회사와 중국 주재 기관들)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국방과학원 화학재료연구소의 주도적인 연구로 현재는 완성 단계에 거의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북한의 이번 제6차 핵실험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스스로 주장했듯 ICBM에 탑재할 용도의 수소폭탄 실험의 성공에 근접했다는 것은 추후 예상되는 ‘화성-14형’ 발사 실험과 함께 ‘대업의 완성’ 수준에 도달했다고 추정해본다. 다만 수소탄 실험을 신뢰할 수 있는 공기 중 성분분석 증거(인공 헬륨 혹은 제논 입자) 채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척도는 시간을 두고 더 살펴봐야 한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북한 핵개발 컨트롤타워는? 베일 속 216연구소가 진두지휘 [조선중앙TV]가 과거에 공개한 영변 핵시설 내부 모습.연합뉴스 북한의 진일보한 핵개발 배경에는 인재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부터 장막 뒤에서 핵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컨트롤타워까지 촘촘하게 짜인 조직들이 자리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이와 관련해 ‘1276호’와 ‘1279호’ 등 연재 기사를 통해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일단 그 자양분은 ‘북한판 네바다’로 불리는 영변 핵시설이다. 영변 핵시설은 평양과 약 103km 떨어진 평안북도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 특수성 탓에 평양시 중구역 충성동으로 별도 관리된다. 영변 핵시설의 역사는 1962년 ‘원자력 연구소’ 건립에서부터 시작됐다. 1986년 처음 핵폭탄 연구를 위한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한 영변 핵시설은 1990~2000년대 핵물질 농축 및 기술개발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영변 핵시설 안에는 ‘우라늄자원 개발연구소’, ‘핵물리 연구소’, ‘방사화학 연구소’, ‘동위원소이용 연구소’, ‘중성자물리연구소’, ‘원자로설계연구소’, ‘핵전자학 연구소’, ‘방사선방호 연구소’ 등 핵 기술 관련한 모든 세부 분야 연구기관들이 들어가 있다. 또한 이곳에는 전문교육기관인 영변물리대학도 들어서 있다. 영변물리대학은 핵개발 각 부분의 실질적인 운영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이곳은 북한 전역의 과학 분야 인재들을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한다. 영변물리대학은 김일성대 물리학부 원자력학과, 김책공대 원자력학부와 함께 북한 핵개발 인재들을 공급하고 있다. 풍계리 핵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곳은 외부에도 잘 알려진 131지도국(원자력총국)이다. 사단 급 규모(구성원은 약 2만 명 추정)로 알려진 131지도국은 풍계리 핵시설을 관리하고 실질적으로 운영을 보장하고 있는 몸통 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원자력공업성이라는 명판을 들고 나온다. 아직 북핵 컨트롤타워 기관은 외부에 공개된 바 없다. 지난 2016년 9월 5차 핵실험 당시 처음 등장한 ‘핵무기 연구소’는 실질적인 컨트롤기관이 아닌 대외용 기관으로 추측된다.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리홍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제사회에 신변이 잘 알려진 ‘제재 대상’ 인물이다.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인물을 기밀을 다루는 컨트롤타워 수장으로 보긴 어렵다. <일요신문>은 지난 2016년 10월 20일 연재기사를 통해 북한 핵개발의 실질적인 컨트롤타워인 ‘216연구소’의 실체를 이미 공개한 바 있다. 아직 비공개 조직으로 남아있는 ‘216연구소’는 2006년 1차 핵실험 직후 김정일에 의해 설립됐다. 30명 미만의 선별된 조직으로 구성된 이 연구소는 국방위원회 직속 기관(본부는 평양시 중국 창광동에 위치한 국방위원회 본관에 위치)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실제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 |
북한 핵개발 비하인드스토리 ‘소련 붕괴 때 핵심기술 쏙쏙’ 북한의 핵 개발 역사의 8할은 갖은 방법을 동원한 해외기술의 도입 및 탈취에 있다. 그 개발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국가는 단연 러시아(구 소련)다. 북한은 1953년 3월 소련과 원자력 평화적 이용 협정을 체결하고, 1962년 영변 원자력 연구소를 건립할 때 소련으로부터 2메가와트급 소형 연구용 원자로(일명 IRT-2000)를 들여온다. 이것이 북한 핵개발의 첫 걸음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북한과 소련 간 평화적 핵 이용을 위한 외교적 교류 차원이었다. 문제는 음지에서의 기술 탈취였다. 북한은 소련 붕괴를 즈음한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혼란을 틈타 각종 방법을 동원해 소련의 핵기술을 빼온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북한 당국은 소련 출신의 핵개발 분야 과학자들을 비밀리에 초청해 자국의 기술 확보에 이용했다. 연간 12만 달러 이상의 거액과 윤택한 연구 및 생활상 편의를 보장하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이는 <일요신문>이 지난 2014년 11월 24일 ‘제1176호’ 기사를 통해 처음 공개한 2004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통해 잘 드러났다. 김정일은 이때 “연구소에서 사업하고 있는 소련(러시아) 과학자들을 잘 돌보라”는 지시사항을 내린 바 있다. 두 번째로 북한은 소련 붕괴 당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위성국으로 공작조를 파견해 직접 기술을 빼돌렸다. 이 시기 북한 공작조들은 위성국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핵배낭 등을 북한으로 몰래 들여와 해체 작업을 통해 기술 근간을 마련했다. 한편 북한의 우라늄 농축기술은 파키스탄의 협조가 컸다. 북한은 1995년부터 파키스탄의 협조를 통해 우라늄 농축기술 연구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한다. 조총련 라인을 통한 일본의 핵미사일 개발기술 역시 북한으로 교묘하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일요신문>이 지난 4월 5일 ‘제1300호’ 기사에서 조명했듯, 특히 조총련계 이시구 박사의 역할이 컸다. 이 박사는 이화학연구소(RIKEN·리켄) 출신으로 우라늄 농축 기술 연구와 플라즈마 상태(전자와 이온이 분리)의 우라늄 핵폭탄 효율성 증대 연구 분야에서 큰 획을 남긴 핵물리학자 고 후스미 코지 박사의 제자로 들어가 많은 기술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는 일본 내 주요 매체에서도 심도 있게 조명한 부분이다. 이밖에도 북한은 서방세계 곳곳에도 기술 탈취를 위한 공작조를 파견해 기술 확보 노력을 꾀한 것으로 확인된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