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는 핑계…흑인이 미스아메리카에 오른 ‘죄’
1984년 미스아메리카 당시의 바네사 윌리엄스.
1963년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는 아프리카계와 유럽계가 섞인 혈통을 타고 태어났고, 백인 중산층 지역에서 성장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으며,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재즈 댄스,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다. 학업 성적도 뛰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시라큐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연극과 뮤지컬을 전공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1983년 4월, 바네사 윌리엄스는 대학에서 ‘미스 시라큐스’에 뽑혔고 석 달 뒤 ‘미스 뉴욕’이 된다. 사실 미인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에 망설였지만, 순위에 들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기에 용기를 했다. 그리고 1983년 9월 미스 아메리카가 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인 ‘유색 인종 미스 아메리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 안엔 분명 거센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금발의 글래머러스한 백인이 차지했던 미스 아메리카.
흑인에 너무 마르고 양쪽 눈동자 색이 다르기까지 한 바네사 윌리엄스가 그 자리에 앉은 것에 대한 미국 대중의 불만이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공민권 운동을 통해 유색 인종의 인권 신장을 이룬 아프리칸 아메리칸에게 바네사 윌리엄스는 소중한 존재였다.
문제의 펜트하우스 표지.
당시 사진은 1982년 여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윌리엄스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학비를 벌기 위해 뉴욕의 포토그래퍼 톰 치아펠의 팀에서 어시스턴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몇 달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치아펠은 윌리엄스에게 누드 사진 촬영을 제안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호기심이 생겼고, 실루엣으로 촬영해 누군지 식별할 수 없을 것이며, 결코 어디에 발표하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윌리엄스는 용기를 내 카메라 앞에 섰다.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부모님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화근은 치아펠을 너무 믿은 것이었다. 윌리엄스가 미스 아메리카가 된 후 치아펠은 자신이 그녀의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걸 기억해냈고, 사진을 들고 성인 잡지 편집부의 문을 두드렸다. <펜트하우스>와 <플레이보이>에 접촉했는데 <플레이보이>의 휴 헤프너 사장은 거절했다. 윌리엄스를 희생양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펜트하우스>의 밥 구치노 사장은 윌리엄스의 누드 화보를 실었고, 창간 이후 최고의 수익을 거두었으며, 윌리엄스의 고소로 500만 달러의 소송에 휘말렸다.
“나는 배신감과 혼란감을 느꼈으며, 마치 강간을 당한 듯한 수치심을 겪어야 했다.” 바네사 윌리엄스의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력과 명예는 한순간에 붕괴되었고, 미스 아메리카에서 국가의 수치로 전락했으며,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회적 왕따’가 이뤄졌다. 사건이 일어난 후 그녀는 꾸준히 이런저런 오디션에 응모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1980년대 말 어느 뮤지컬 오디션에선 수모의 극단을 맛보았다. 작사가인 아이러 거쉰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아내인 레오노어 거쉰이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네사 윌리엄스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창녀를 내 쇼에 들어오게 할 순 없어!” 이러한 종류의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윌리엄스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수모의 대상이 되었다.
음악적 재능과 열정과 연기력과 미모를 겸비한 바네사 윌리엄스는 그렇게 시간을 버텼고, 당시에 대해 그녀는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4년 후인 1988년에 그녀는 가수로서 첫 앨범을 내 알찬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연기자로서도 영화와 시트콤으로 조금씩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그녀가 엔터테인먼트로서 제대로 된 궤도에 오른 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고 그녀는 어느덧 서른 즈음이 되었다. 사진 한 장으로 인해 그녀는 20대 시절을 날려 버린 셈이다.
2015년 9월 13일 미스 아메리카 경연대회 당시의 바네사 윌리엄스.
그리고 2015년 9월 13일 미스 아메리카 경연대회, 바네사 윌리엄스는 32년 만에 그 무대에 다시 선다. 심사위원장이었고, 특별 공연에서 ‘Oh How the Years Go By’를 불렀다. 노래 제목처럼 긴 세월이 흘러 어느새 50대 중년이 된 바네사 윌리엄스. 노래가 끝나자 미스 아메리카 조직위원회의 CEO 샘 해스켈이 나와 한 세대 전의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윌리엄스는 미소로서 받아들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