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스타덤 오른 금발의 미녀…거장의 ‘흑심’ 뿌리치자 앞길 막혀
티피 헤드렌
다른 여배우들이 히치콕과 만나기 전에 나름의 지명도를 지니고 있었다면, 티피 헤드런은 달랐다. 히치콕과 31년의 나이 차가 났던 헤드런은 순전히 히치콕에 의해 픽업되어 배우가 됐고, 히치콕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진 배우였다. 그런 만큼 그녀에 대한 히치콕의 욕망은 강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뒤틀린 욕망이었다.
1930년에 태어난 헤드런은 하이스쿨을 졸업한 후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스무 살에 뉴욕으로 떠난다. 모델로 성공한 그녀는 수많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여러 편의 CF에 출연했다. 이때 만난 광고 기획자 피터 그리피스와 1952년에 결혼해 1957년에 첫딸 멜라니를 낳은 헤드런은 1961년 이혼하면서 캘리포니아로 이사한다. 참고로 멜라니 그리피스 역시 배우가 되어 <워킹 걸>(1988)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그녀의 딸 다코타 존슨 역시 배우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2015)로 스타가 됐다.
동부에서 성공했던 헤드런은 서부에서도 자신의 위상을 이어갈 줄 알았지만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모델을 찾는 클라이언트는 많지 않았다. 생활고를 걱정해야 할 즈음, 에이전트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감독인 앨프리드 히치콕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 다이어트 음료 광고에 나온 헤드런의 모습에 끌렸다는 히치콕은 헤드런을 직접 만난 후 장기 계약을 제안했다. 7년 동안 히치콕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독점 계약이었다.
사실 티피 헤드런은 당시 히치콕이 이끌던 TV 시리즈 정도에 출연할 줄 알았다. 하지만 히치콕은 <새>(1963)의 주인공으로 생짜 신인인 티피 헤드런을 내세웠다. 단지 캐스팅만 한 게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영화 의상 디자이너였던 에디스 헤드에게,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까지 포함한 헤드런의 패션 전반을 부탁했다. 직접 레스토랑에 데려가 와인과 상류층 음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새> 캐스팅을 제안할 땐 금과 진주로 된 새 모양의 머리핀을 선물하기도 했다.
현장은 엄격했다. 배우로서 전무 상태인 헤드런에게 히치콕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가혹했다. 새의 공격을 받는 장면에서, 진짜 새를 데려다 부리에 살짝 고무 밴드를 붙인 후 세트 안에 풀어놓았다. 새가 눈을 찌를 뻔한 적도 있었고, 의사는 일주일 정도 쉬어야 한다고 했지만 히치콕은 촬영을 강행했다. 고생만큼 결과는 좋았고, 헤드런은 골든글로브 신인상을 수상했다. 히치콕과의 두 번째 작품인 <마니>(1964)가 이어졌다. 상대역은 숀 코너리. 공포에 질리기만 하면 됐던 <새>에 비해, <마니>의 캐릭터는 매우 심리적이며 다층적이었다. 개봉 당시엔 크게 평가받지 못했지만, <마니>는 히치콕의 걸작 중 한 편이며, 헤드런도 후세의 평론가들에 의해 훌륭한 연기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현장은 악몽 그 자체였다. 히치콕의 ‘부적절한 요구’ 때문이었다.
티피 헤드렌과 히치콕
당시에 대해 헤드런이 처음 입을 연 건 10년 정도 시간이 지난 1973년이었고, 히치콕이 세상을 떠난 후인 1984년에 도널드 스포토의 책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말문이 터졌다. 그리고 2012년에 헤드런과 히치콕의 관계를 담은 TV 영화 <더 걸>이 나오면서 완전히 공론화됐다. 헤드런의 고백을 요약하면, 히치콕은 그녀에게 강박적으로 빠져 있었다. <새>를 찍을 땐 두 명의 스태프를 시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다른 스태프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히치콕은 헤드런을 소유하려 했고, 리무진에선 거칠게 몰아붙이며 키스하려고 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사장 루 와서먼에게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히치콕은 최고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꿈에 헤드런이 나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도 했고, 자신을 만지라고도 했으며, 의상실에 몰래 들어와 헤드런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고도 했다.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히치콕에겐 짓궂은 장난 정도였을지 몰라도, 헤드런에겐 매일매일 힘겨운 전쟁이었다. <마니>를 마치고 그녀는 계약 파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라고 했다. 거부하자 히치콕은 헤드런이 다른 영화에 출연하는 길까지 막았다.
결국 그녀는 히치콕이 계약 관계를 이용해 개인적으로 설정한 블랙리스트에 의해, 수많은 감독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그 어떤 영화에도 출연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에 헤드런에 대한 권리를 유니버셜에 넘겼고, 헤드런은 1967년에 채플린의 마지막 영화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에 출연했지만 조연에 불과했다. 히치콕에 의한 경력 공백의 후유증은 심각했고, 당당하게 주연급으로 데뷔했던 헤드런은 하강세를 겪으며 1970년대에 네 편의 영화밖엔 출연하지 못했다. 올해 87세로 여전히 현역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티피 헤드런. 작년에 회고록을 출간한 그녀는 당시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히치콕은 내 배우 경력을 파괴했지만 내 인생을 파괴하진 못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