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텃밭 텃새들도 철새되어 날아들자…문전성시 민주당 ‘딜레마’
추미애 민주당 대표와 김태년 정책위의장이 지난 11월 21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포항 지진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고위 당정청 협의회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권민호 경남 거제시장은 지난 19대 대선 직전 한국당을 탈당했고 현재 무소속이다. 권 시장은 민주당 입당을 타진하고 있지만 민주당 거제 지역위원회 등의 극심한 반대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않고 있다. 권 시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한국당에 몸 담았지만 거제 출신 문재인 대통령이 잘돼야 한다는 바람으로 탈당했다”고 탈당 이유를 밝혔다.
거제시는 대선이 끝난 직후 문 대통령 생가 복원 사업을 진행하려다 논란이 되자 생가 보존 및 편의시설 설치로 방향을 선회했다. 당시 권 시장이 민주당에 잘 보이려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무성했다.
권 시장 입당을 반대하고 있는 변광용 민주당 거제지역위원장은 “권 시장이 무슨 이유로 입당하려는 건지 속마음까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국정농단 사태로 한국당 지지율이 폭락하기 전까지는 민주당과 전혀 스킨십이 없던 사람이라는 것”이라며 “한국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권 시장의 입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경남도당에 한국당에 몸 담았다 입당한 사람들이 많다. 권 시장의 경우는 우리 당과 정체성이 너무 다른 인물이라 받아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당 텃밭인 대구에서도 민주당 입당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 지역신문인 <대구신문>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올해 12월까지 대구 지역 전·현직 지방의원 5명 이상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있던 최기원 전 수성구의회 의원도 지난 11월 민주당에 입당했다.
한국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대구시당 측도 당적 이동은 개인정보에 해당한다며 새로 입당한 정치인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충주시의회에서는 정상교 의원이 한국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하기로 하면서 여야가 균형을 이루게 됐다. 충주시의회 전체 의원 수는 19명인데 이중 민주당이 7명, 한국당 9명, 무소속 3명이었다. 정 의원이 당적을 옮기면 민주당과 한국당이 각각 8명으로 동률을 이루게 된다. 정 의원뿐만 아니라 무소속 의원들도 추가로 민주당에 입당할 가능성이 커 충주시의회에서 여야 의석수가 역전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나온다.
정 의원은 당적을 옮기게 된 이유에 대해 “저는 원래 친박이었다. 그런데 국정농단의 책임을 져야 할 정당이 계파 싸움에만 몰두해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국당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민주당에 입당한 후 공천 못 받더라도 백의종군하겠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당 지지율에 따른 유불리를 계산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충주시의회 한국당 의원들은 성명을 통해 “정 의원은 수많은 충주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전형적인 철새 정치인”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당 텃밭인 부산 강서구에서는 유력 구청장 후보 두 명이 모두 한국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눈길을 끈다. 내년 지방선거에선 당적을 옮긴 인사들끼리 구청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될 전망이다. 노기태 현 강서구청장은 지난 3월 민주당에 입당했고, 안병해 전 청장은 지난해 총선 때 입당했다. 한국당에서는 아직 유력한 강서구청장 후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두 사람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내년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자천타천 민주당 입당설에 휩싸이는 한국당 정치인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윤석우 충남도의회 의장은 공주시장 출마를 위해 조만간 민주당에 입당할 것이란 지역 신문의 보도로 논란이 됐다. 논란이 커지자 긴급 소집된 한국당 의원 총회에서 윤 의장은 “늦은 시간에 기자가 전화를 해 ‘한국당 탈당하고 민주당 가느냐’고 묻길래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고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전부”라며 “왜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실히 당을 옮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요구에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말 저런 말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나에게 앞으로 탈당을 안 하겠다고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 인권과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거부해 입당설을 완전히 진화하진 못했다.
한국당 소속 임창호 함양군수는 지난 12월 19일 이례적으로 민주당 함양군협의회에서 마련한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민주당 입당설이 돌고 있다. 이날 행사는 민주당 함양군협의회가 내년 지방선거 필승을 결의하는 자리였다.
한국당 전직 의원은 “과거에도 선거를 앞두고 유불리에 따라 당적을 옮기는 철새 정치인은 늘 있었지만 보수당 텃밭에서조차 대규모로 당적을 옮기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여당의 지지율이 너무 높아 생긴 현상”이라고 말했다.
한 한국당 당직자는 “현재 추세를 보면 소속 의원의 탈당으로 의석수가 역전되는 지방의회가 더 나올 것 같다. 선거도 하기 전에 소속 지자체장이나 지방의원 수가 줄어들고 있다”면서 “선거에서 현역 프리미엄이 있는데 텃밭 현역 정치인들마저 민주당으로 빠져 나가고 있는 실정이니 내년 지방선거가 정말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당 이적 정치인에 대한 민주당 내의 시각은 둘로 갈린다. 한 민주당 의원 보좌진은 “현재 우리 당 지지율이 높지만 보수 텃밭의 경우 한국당 가입 이력이 없는 출마자를 찾기가 어려운 지역도 있다. 과거 한국당에 몸 담았던 인사라도 적극 영입해서 지역주의를 깨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또 다른 민주당 의원 보좌진은 “당 지지율이 이렇게 높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보수 텃밭이라고 해도 승산이 있다고 본다. 아예 우리 당 후보가 없다면 모를까. 그 지역에서 활동해온 우리 당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면서 “여러 명분을 내세우지만 최근 우리 당 지지율이 높아져서 오려는 것 아닌가.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당에 들어오면 잡음만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